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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장동 May 10. 2020

[단편] 주인님을 찾습니다 - 5

아파트 동 대표 체험기

 아파트 도장공사에 낙찰된  A업체는 세 가지 도안(圖案)을 만들어 왔다.

  P과장이 자료를 펼쳐 본 순간,  

 ‘세상에 이럴 수가, 신이시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첫 번째 도안은 마치 선정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양,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워 제작 의도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두 번째 도안은 미지근하고 건조하여 도무지 아무런 느낌이 없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작년에 공사를 마친 옆 단지와 색상이 동일했으며 디자인만 약간 변경됐다.

 정상적으로 추진된다면 세 번째 도안이 채택되어 앞 단지와 동일한 색상으로 단지가 채색될 것은 자명했다. 

 세가지 도안에 대한 관리소장 설명이 끝나자, 동 대표들은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끄덕 했고 일사천리로 주민투표에 세 가지 도안을 상정하는 코스가 무난히 갈 것처럼 보였다.

 P과장이 일어서기 전까지는.
 

 “저는 A업체가 제출한 세 가지 중에서 첫 번째, 두 번째 도안을 제출한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무성의하고 한심한 도안을 왜 제출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가 도안 두 개를 양손에 들고서,

 “어떻게 이런 우스꽝스러운 도안을 가지고 우리 주민들에게 선택하라고 할 수 있죠? 아무리 여기 계신 분들이 저보다 연배가 많으시고 디자인에 대해 문외한이라고 해도 저 색상과 디자인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세요?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들 계신 겁니까?

 P과장의 도발적인 발언과 제스처에 모두 흠칫 놀란다. 

 “제가 보기에는 아무 하자가 없어 보이는데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능구렁이 소장이 이내 전열을 정비하고 대꾸한다. 

 “저도 이런 말씀까지 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선정된 A업체가 우리 앞 단지 도색공사도 수주했던 동일 업체라고요.

 그렇다면, 이런 엉터리 도안(첫 번째, 두 번째)이 제출된 이유가 혹시 세 번째 도안으로 몰아가기 위한 전략 아닌가요?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혹시 앞 단지와 동일한 색상으로 유도해서 앞 단지 공사 후에 재고로 남은 페인트를 우리 아파트 공사에서 소진하려고 그러는 건가요?


 P는 결연하고 물러설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관리소장은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며 절대 아니라고 펄펄 뛴다. 

 “그런 오해를 피하고 싶다면, A업체는 다시 도안을 작성해서 제출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서울 시내만 하더라도 새 아파트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아파트에서 최신 트렌드인 좋은 색상과 디자인을 벤치마킹해서 우리 아파트에 적용하면 아파트 이미지, 외관 모두 좋아지고 주민들 만족도도 훨씬 높아질 겁니다.
”      

 어색한 침묵이 슬쩍 스며들었다. 전체적으로 회의를 주도해야 하는 회장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천장 하늘만 바라보고, 관리소장은 여전히 좌불안석.

 그때 갑자기,

 “제가 보기에는 색상, 디자인 모두 무난해 보이는데요. 뭐, 더 잘 만들었으면 좋았겠지만, 장마철도 다가오고 시간이 없다고 업체에서 계속 재촉한다 하니 주민투표에 붙여 봅시다.

 우리 아파트 주민들 안목이 아주 높고 색상에 대해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투표해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일단, 주민투표로 갑시다.


 초기에 공사를 극구 반대하던 하늘 부동산 사장이자 1동 대표가 나서 관리소장 입장을 대변한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P가 다시 말을 하려고 일어서는 순간,

 “젊은 양반이 그렇게 자기주장만 하신다면, 회장님! 투표로 결정하시죠. 시간만 길어지고..

 가뜩이나 큰 키에 목소리까지 쩌렁쩌렁 울리며 하늘 부동산 사장이 신경질적인 투로 뱉는다.

 “투표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주민들 입장에서 다시 한번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한 번 색칠하면 최소한 칠 년은 가야 하는데 업체가 재촉한다고 이렇게 졸속으로 처리하면 어떡합니까?

 P도 물러서지 않는다.  

 “졸속? 졸속이라뇨.. 젊은 양반이 보자 보자 하니까.

 입에 거품을 물고는 하늘 부동산 사장이 갑자기 회장 쪽을 바라본다.

 “자.. 자.. 자! 그만.. 그만.. 저는 회의를 주재하는 회장으로서 가급적 투표는 원하지 않지만, 이렇게 갈등이 계속된다면 민주적 방법인 투표로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더니 잠시 생각하느라 뜸을 들이면서

 “투표는 거수투표, 손을 들어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투표 후, 회장은 관리사무소 제출 안건이, 

 찬성 5표, 반대 1표(P과장), 기권 1표(벤자민 아저씨)로 통과되었다고 확인하며 다음 안건으로 심의를 이어갔다.

 회장은 이마에 ‘나는 교육자입니다’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다. 얼굴에도 그렇게 써져 있다. 그런 그가 아파트 도장 공사에서 연속적으로 보이는 위선적이고 석연치 않은 행태를 P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회의 종료 후, 문을 열고 나가던 P과장은 회장과 1동 대표에게 또다시 감사를 표하는 능구렁이 소장에게

 “쉿! 조용히... 이 사람이... 누가 오해하겠네, 참.

 하는 그들 간 낮은 속삭임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부터 아파트 각 동 입구에는 세 가지 색상으로 외벽을 디자인한 그림이 칼라로 전시되었고, 무심히 지나가는 주민들을 상대로 경비원들이 투표함을 들고 와 투표를 독려했다. 그리고 결과는 압도적으로 세 번째 색상이 채택되었다.

 약 1개월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아파트 외벽공사가 완료되고 공사업체는 철수했다. 그제야, 아파트 주민들은 앞 단지와 디자인만 살짝 바꾼 똑같은 색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부질없이 웅성거리며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따졌지만 그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동 대표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주인(주민)들은 또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 일상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P과장은 아파트 관리소장이 본인 건강상의 이유로 스스로 퇴직을 신청했고 새로운 소장이 곧 부임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휴대폰 문자를 통해 전달받았다.

 일부 주민들은 관리소장이 제대로 한 건 해 먹고 빠졌다며 마치 자기들과는 관계 없는 남의 일인 냥 뒤에서 쑥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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