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몇 년이 흘렀다.
신입 사원이었던 까칠 계장은 이제 제법 자리 잡힌 대리가 되었다. 그는 허 실장을 졸라서 본인이 그토록 원했던 글로벌 사업부로 폼을 잡으며 옮겨갔다.
그는 부서이동 전에 마치 밀린 숙제라도 하듯,
그동안 자기 밑에서 온갖 짜증과 투정을 다 받아 가며 세상 쓴맛을 뒤늦게 경험한 최 주임의 정규직 전환을 위해 허 실장을 스토커 수준으로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그때 까칠 대리는 자기 인사고과는 밑으로 깔아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신 최 주임만은 반드시 S등급을 주어야 한다고 협의인지, 부탁인지, 협박인지 구분이 되지 않은 건의를 반복하였다.
이에 감동한 허 실장도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최 주임은 드디어 정규직 계장이 되었고, 이후 결혼도 하면서 겹경사를 맞았다.
그 사이, 박 과장은 승진 누락의 아픔을 한 번 더 경험하고 마침내 차장이 되면서 타 부서로 영전해 떠났다. 그는 마지막 회식 자리에서 뒤늦게나마 실장님 덕분에 승진했다며 이번에는 뻔하지 않은 진정한 감사를 했다.
이렇듯, 좋은 만남과 헤어짐이 어우러져 가던 어느 날, 임원 승진을 눈앞에 둔 허 실장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로 권 계장 후임으로 영업부에서 온 양 대리가 업무미숙으로 마일리지 정산 프로그램을 잘못 운영하면서 탑승 고객 마일리지 체계에 커다란 오류가 발생하였다.
이것을 한 고객이 언론에 제보하면서 언론사와 시민단체가 합세하여 회사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연일 인터넷과 신문에 주요 기사로 부각되면서 새로 부임한 사장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해명하기 바빴다. 이 사건으로 감사부서가 총출동하여 관련 자료를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담당 본부장은 즉시 집으로 보내졌고, 허 실장과 양 대리는 직무에서 배제되고 대기발령 조치가 이루어졌다. 다음 날부터는 본사 6층 텅 빈 OA교육실에서 끝도 없는 경위서 작성, 문서 결재 방식과 절차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를 받았다.
같은 회사 소속 직원이기는 했으나, 감사실 직원들은 냉정하기만 했다. 마치 무슨 범인이나 공범이라는 되는 듯, 털면 안 나오는 먼지가 어디 있냐는 듯, 무려 일 개월 간 집중적인 조사 끝에 양 대리는 업무 과실로 무기 정직 처분되었다.
허 실장은 부하직원 관리감독 소홀을 이유로 3개월 감봉조치와 아울러 지방 B급 지점장으로 좌천되었다. 그나마도, 면免보직될 위기에 처했는데, 그동안 마케팅 추진 성과, 조직에 대한 충성도, 수많은 동료들의 탄원 덕분에 그는 입사 이래 처음으로 낯선 중소 도시 영업소장으로 쫓기듯 부임하였다.
많은 위로와 격려 전화, 문자가 그에게 전달되었다.
예기치 않은 한 방에 그는 좌절했다.
나이나 입사 기수를 고려해 보면, 이제 임원 승진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 그는 공허감을 견딜 수 없었다. 텅 빈 가슴으로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며 혼자 오피스텔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그렇게 일 년, 이 년이 흘러갔다.
그동안, 동기 둘이 임원으로 승진하고 올 초에는 입사 후배 두 명도 별을 달았다. 나름대로 마음의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허 실장, 아니 이제 허 지점장은 이후 임원 승진 발령 때마다 자신도 어쩌지 못하고 우울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갔다. 본사에서는 아무도 그를 불러주는 이가 없었다. 그는 직원 관리, 리스크 관리 능력에 하자가 있는 간부 그룹에 속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간 어느 날, 그는 까칠 대리로부터 메일을 하나 받는다.
“실장님, 회사에서 터키Turkey에 연락사무소를 세우는데, 제가 주재원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에 출발합니다. 당분간 연락을 못 드릴 것 같아서요.”
권 대리는 아직도 그를 실장님이라 부른다.
자기가 직장생활을 하는 한 ‘영원한 허 실장님’이라고 했다. 그는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정말 잘 되었다고, 격려 회신을 보내 주었다. 사실, 대리급에서 해외 연락사무소로 나가는 전례가 없었을 만큼, 그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셈이었다.
모두 그에게 ‘까칠’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틀어쥐고 끝을 보는 그의 근성을 회사에서 인정한 것이라 했다. 까칠 대리는 메일 끝에,
‘허 실장님, break a leg!'
라고 적고는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며 마무리 멘트를 보내 주었다.
한편, 권 대리는 평소의 까칠함을 무기로 휘어잡았던 후배 삼십여 명을 환송식에 초대하는 그 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입사 이래 겪었던 온갖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후배들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 그는 대리급에서 최초로 해외 주재원으로 파견될 만큼 직장에서 성공한 가장 큰 비결을 묻는 한 후배에게, 자신의 노력과 아울러 훌륭한 선배를 잘 만나야 한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회사에서 누가 가장 존경스러운 롤모델이냐는 물음에 대해 그는 거침없이,
“나의 롤모델은 현재 B영업소에 계시는 허 실장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분이 아직도 그곳에 계신 것이 너무도 마음이 아프다고, 자기가 그분께 글로벌 본부로 보내 달라고 조르지 않고, 계속 마케팅 본부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으면 그분에게 불의의 사고는 없었을 것”
이라며 까칠 대리답지 않게 눈자위를 붉혔다고 한다.
그는 또
“한 번 보스는 영원한 보스”라고도 했다.
그의 그런 태도에 후배들 모두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듯 긴 여운을 남겨 놓은 후 터키로 떠났다. 그의 송별회 멘트는 회사 주니어급 사이에 화제가 되었고, 마침내 허 지점장 귀에 까지 들리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소식을 듣고 한참이나 ‘허허’ 하며 까칠 대리를 회상하다 그는 메일을 하나 보냈다.
“인간아, 너는 왜 송별회에서 엉뚱한 이야기를 해서 후배들 울렸냐? 아무튼 고맙다. 내가 너에게 해준 것도 별로 없는데....”
“별말씀을요^^ 언젠가 허 실장님이 술 취하셔서 제가 등에 업고 댁에 모셔드린 적 있잖아요. 그때 제가 실장님께 말씀드렸죠? 저를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그래도 실장님이 어려우실 때면 제 생각날 거라고... 기억나세요? 사랑합니다. 나의 첫 번째 보스님!!”
허 지점장은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과 이제는 잊힌 존재가 된 자신을 끝까지 챙겨주는 옛 부하 직원에 대한 복잡한 감상 때문이었으리라. 그저 사람은 오래 사귀고 보아야겠다는 늦은 다짐을 되새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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