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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Aug 09. 2024

스스로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5. 솔직해져도 괜찮아요(6)

“할머님이요? 어떡해요, 세상에…”


아니나 다를까 김은지의 입꼬리가 축 처지며 어깨마저 내려앉았다. 최현욱이 손뼉을 두어 번 치며 가볍게 분위기를 바꾸었다.


“아주 심각한 병환은 아닌 것 같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김은지 수강생님, 지금은 물레에 집중할까요?”

“아, 네!”


대답은 싹싹하게 했어도 그녀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곁에서 유심히 김은지의 낯빛을 살피던 윤소은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저 몇 번의 강습을 같이 했던 이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사람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적어도 제 주변엔 없는 것 같았는데. 사람은 모두 적당히 타인에게 어느 정도의 감정적 거리를 두고 사는 게 아니었던가. 누군가의 불행에 함께 휩쓸리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정서적 안정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믿어왔던 윤소은은 여전히 흔들리는 눈으로 흙더미에 얹은 손에 잔뜩 힘을 싣고 있는 김은지를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뿐인가. 병원에서 마주쳤던, 여전히 소년 같은 이진우는 어떻고. 너무 오랫동안 외롭게 버텨와서 자신이 외로운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조금 더 많이 살아봤다고, 지금 한참 막막할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생경했다. 이제 내가 좀 살만한 걸까.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음이 신기했다.


“와아!”


잠시 딴생각에 빠진 사이에 환성이 터졌다. 흩어졌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짝 긴장하고 있던 모습은 어딜 가고 함빡 웃음 짓고 있는 김은지가 보였다. 이로미는 마치 제가 성공한 것처럼 방방 뛰었고 최현욱이 크게 손뼉을 쳤다.


“아주 잘하셨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잘하기가 쉽지 않은데 대단하세요.”

“선생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저는 말만 얹었죠. 잘하셨어요.”


윤소은은 환하게 웃는 김은지의 얼굴에서 익숙한 감정을 읽어냈다. 그건 온전히 제 힘으로 뭔가를 해낸 사람이 보여주는 자랑스러움으로 벅찬 표정이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스스로가 뿌듯하여 절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충족감. 보고만 있어도 덩달아 입꼬리가 함께 올라가는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자아가 건강하게 한 뼘 자라는 순간을 목도하는 건 보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함께 기뻐하고 있는 이로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스러운 사람. 윤소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배었다. 무엇이든 의욕적이고 신나게 임하는 사람. 사랑받고 자란 티가 완연한 사람. 결단코 누구나 평범하게 누릴 수 없는 행운임에도 그것이 세상의 표준일 거라고 믿고 자랐을 사람. 그럼에도 그늘 없는 제 곁으로 오라고 천진하게 타인에게 손을 뻗는 사람. 


“앉으세요, 윤소은 님도 해보셔야죠.”


지켜볼 때는 몰랐는데 막상 물레 앞에 앉으니 엄청나게 긴장이 되었다. 이미 한 번씩 거쳐간 이로미와 김은지가 이해한다는 얼굴로 윤소은을 바라봤다.


“그냥 하면 되지 싶었는데 좀 긴장되긴 하네요.”


너스레를 떠느라고 한 말인데 다들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윤소은의 농담은 영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듯했다. 배운 대로 성실하게 손을 놀리는데 온통 신경을 쏟아부었는데도 흙더미는 그녀를 놀리듯 한쪽으로 푹 기울어 꺼져버렸다. 무너진 틈이 하필이면 히죽거리는 입술 모양을 닮아있었다.


“교수님도 1차 시도 실패.”


어쩐지 즐거운 음성이었다. 재잘대는 이로미를 향해 윤소은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러게요. 눈으로 볼 때만 쉽네요.”


최현욱은 정작 아무 말없이 찌그러진 형상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치 문제가 발생한 현장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고심하는 소장 같은 모습이었다. 혹은 풀리지 않는 심오한 철학적 문제로 고뇌하는 학자라든가.


“저기, 선생님?”

“아아.”


비로소 공상에서 깨어난 얼굴로 최현욱이 머쓱하게 뒷덜미를 긁적였다. 


“뭘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너무 심하게 처참한 결과였어요?”

“무슨, 아니에요, 로미 씨. 그런 게 아니고… 생각 외로 이런 비정형적인 형태가 멋있어 보여서 잠깐 생각 좀 하느라 그랬어요.”

“설마요.”

“진짜예요. 마지막 수업 때 시도해 보면 좋을 만한 주제가 생각나서…”


최현욱이 비밀을 감추는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흐렸다. 그에 관해서 더 말하는 대신, 그는 다시 한번 같은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더 비유를 곁들여서.


“그러니까, 일종의 밀당이에요. 오른손은 좀 더 힘을 줘서 딱 받쳐주는 거고. 왼손은 따라가며 쓸어주는 느낌이랄까. 뚝심 있게 오른손이 버텨주면 중심이 잡히는 거예요. 근데 흙을 못 이기고 회전하는 힘에 딸려가 버리면 지는 거죠. 이해가 가시려나…”

“음, 조금 알 것 같아요. 한 번만 더 해 봐도 되나요?”

“교수님께 기회 한 번 더 드릴까요, 로미 씨?”

“그러죠 뭐, 까짓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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