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멜라 린든 트래버스, 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
지금도 어딘가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을 것만 같은 당신께 :
친애하고 친애하는, 외가 쪽으로는 인도 코브라의 오촌 조카뻘이 되는 (189쪽) 어마무시한 혈통을 자랑하는 메리 포핀스.
당신의 이름을 불러볼 때면 영국의 어느 복닥한 가정집에서 떽떽거리며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메리 포핀스 하면 역시 런던이 최고로 어울리지만, 어쩐지 바스도 썩 잘 어울리는 도시라는 느낌이 들어요. 앵무새 머리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양산을 든 메리 포핀스와 바스의 거리는 생각만 해도 굉장히 멋지게 어우러지거든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에는 어떤 종류의 연이 있다고 믿거든요, 저는. 그건 마치 두 개의 끈이 만나 생겨난 매듭 같은 거예요. 성길 수도 있고 빡빡할 수도 있겠죠. 기막히게 예쁜 모양일 수도 있고 영 보기 좋지 못한 것도 있을 테고. 하지만 반드시 끝이 있다고 생각해요. 올이 줄줄 풀린 볼썽사나운 연도, 칼로 반듯하게 그어낸 것처럼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끝낼 연도. 당신과 뱅크스 가의 아이들을 잠시나마 함께 지내게 해 준 연을 맺어준 것은, 이제 보니 바람이었군요.
샛바람을 타고 온 메리 포핀스를 데려간 건 하늬바람이었네요. 궁금해서 찾아봤어요. 런던에서 샛바람이 부는 계절은 언제일까 하고요. 그곳에서 샛바람에 해당하는 동풍은 기후 특성상, 주로 겨울과 초봄에 더 자주 나타난대요. 하늬바람은 서풍인데, 런던의 서쪽에는 대서양이 있기 때문에 서풍이 불면 온난하고 습기 있는 날씨가 된다고 하는군요. 주로 여름과 가을에 불고요. 그러니까 당신은 대략 한 계절 하고도 절반 정도를 그곳에서 보낸 셈이 되겠네요. 그런 것치고는 엄청난 모험의 기록들을 남겼구요. 덕분에 제인과 마이클, 바브라와 존도 즐거웠을 테고 당신이 남긴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도 즐거웠을 거예요.
그건 그렇고 말이죠. 당신을 고용한 뱅크스 씨는 정말이지 몹쓸 분이었더군요. 이번에 다시 읽지 않았다면 영영 모르고 지나갈 뻔했어요. 아니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죠?
아니, 나라면 말야, 아침 신문에 낼 광고를 써 줄 사람을 찾아보겠어. '뱅크스 부인은 말할 것도 없고 제인, 마이클, 존, 바브라한테 지금 당장 유모가 필요하다. 돈은 되도록 적게 받고 일은 아주 잘하는 유모여야 한다.'라는 광고를 써 줄 사람을 말야. 그러고 나서 유모들이 대문 앞에 줄을 설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11쪽
솔직히 저는 생각은 자유라고 말하는 쪽입니다만(사상이야 어쩌겠어요, 그건 개인의 고유한 영역인 것을) 그걸 입 밖으로 내서 말하는 건 상당히... 네... 사회화가 덜 됐달까, 교양이 없달까, 여하간 그건 또 말하기 시작하면 필리버스터 급으로 떠들 수 있는 이야기라 지금은 넘어가기로 하죠...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그렇죠. 도대체 뱅크스 씨는 저걸 농담이라고 한 걸까요... 하지만 저는 조금 뒤에 아주 약간이나마 마음을 풀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그 뱅크스 씨가, 부인이 당신에 대해 불평했을 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죠.
"좋아요, 일해 보죠."
뱅크스 부인은 나중에 남편에게 "글쎄 그 여자가 우리한테 무슨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굴더라니까요." 하고 투덜거렸다. 뱅크스 씨는 신문에 얼굴을 처박고 "사실 그런지도 모르지 뭐."하고 대꾸하고는 재빨리 신문을 치웠다. -18쪽
선심의 사전적 뜻을 찾아보면 남에게 베푸는 후한 마음, 이라고 나오거든요. 모르긴 해도 당신이 엄청난 급여를 받았을 것 같진 않고. 아아아, 아무리 고용한 유모가 아이들을 돌보는 게 '보통'이었다고 해도 정말이지 아이 돌보는 걸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애 봐주는 것 정도로 유세 떤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너무너무(x 천 정도 해주세요) 별로라고요. 음, 개인적인 경험이 얹히는 바람에 순간 격해진 감정이 주체가 잘 안 됐네요. 아무튼.
제인과 마이클은 하루하루가 너무 재미있고 흥미진진했겠어요. 침대에 눕기만 하면 색색 잠이 들었을 테죠. 꿈속에선 하루종일 즐거웠던 일들이 조각조각난 이미지처럼 둥둥 떠다니지 않았으려나요.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으려나 마음이 두근두근 했을 거고.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꼬마들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었을 당신이 떠오르는 걸 보면...... 오로지 제인과 마이클의 시선에서만 이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것 역시 아이들의 특권이 아닌가 싶어지는 거예요.
쉬는 날을 데이트로 알차게 보내고 온 당신에게 아이들이 들떠서 묻는 말에 대답해 준 것도 정말 메리 포핀스답다고 생각했어요.
"어디 갔다 왔어요?"
메리 포핀스가 대답했다.
"동화의 나라에."
제인이 물었다.
"그럼 신데렐라 봤어요?"
메리 포핀스가 기가 찬 듯이 되물었다.
"뭐 신데렐라? 나 참, 웬 신데렐라?"
(...)
"그럼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예요? 우리가 아는 동화의 나라가 아니에요?"
메리 포핀스는 가엾다는 듯 말했다.
"몰랐어? 누구한테나 자기만의 동화의 나라가 있는 거야." -37쪽
그 동화의 나라란 자기만의 세계와 다르지 않은 말이겠죠. 말이죠, 메리. 어른이 되고 나서 좋은 점이랄까, 여하튼 재밌는 것 중 하나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순식간에 보인다는 거예요. 그중 누구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금세 알아볼 수도 있죠. 어릴 때는 그런 걸 잘 몰라서 순진하게 아무에게나 마음을 열어주었다가 다친 적도 제법 많았거든요. 당신만큼은 아니어도, 꽤 신랄하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나니 오히려 좋은 점도 많았어요.
"아냐, 아냐. 마음대로 하세요, 메리. 당신은 늘 당신이 원하는 대로 했으니까요. 아무리 한심하고 터무니없는 일이라도 말이죠." -107쪽
동물원의 팬더가 말해준 것처럼요. 정말요,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누가 뭐라건 내가 하고 싶은 걸 내 뜻대로 하는 거, 그게 진짜 중요하더라고요.
그건 그렇고 당신도
"난 동물원에 갈 필요가 없어. 여기가 바로 동물원이니까." -198쪽
라는 말을 했군요...
저도 한때 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말예요. 그래도 제인과 마이클은 가만히 있기라도 했죠? 제가 그 말을 했을 땐 신나게 컹컹 짖는 소리가 대답 대신 돌아왔어요... 머리 아팠겠죠? 정말 그랬답니다 (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