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보다 나를 아는 사람
그는 나를 글로 알았다.
그는 나의 글을 보고 나를 찾아내었다고 표현했다.
나의 글을 읽고
정확하게 내가 느꼈던 감정을 느꼈고
내가 의도한 것을 그의 방식으로 이해하여 그의 언어로 표현해서 들려주었는데 그 과정이 나에게 안심과 편안함을 주었다.
그가 나의 글을 보고 나를 찾아내서 나를 컨택했던 이유를 그렇게 설명하며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뻔한 수작 같지만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건 일단 그는 물리적으로 나와 다른 곳에 존재하기에 그를 받아들이고 그와 교류하는 것이 어떤 위험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구 되자는 말처럼 무해하고 편안한 말이 어디 있을까?
호감이 있는 이성 간은 절대 친구 될 수 없는 걸 알지만 , 친구라는 단어가 주는 중립적이고 안전한 느낌 때문에 일단 시작부터 발을 빼는 일은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와 나는 친구가 되지 않았다. 시작 지점을 안전한 단어로 제시했던 그의 현명함 덕분에 우린 친구 이상이 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관계의 시작부터 발을 빼기 선수였다.
이혼 후 나는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내쳤내기 바빴다. 관계에 대한 나의 이중적인 잣대는 모순 투성이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생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현실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면 두려움에 빠져 도망가고 회피했다.
누군가와 만나고 시간을 보내고 교류를 하는 그 자체가 스트레스로 다가올 만큼 현실에 여유가 없었지만 마음 한 구석은 이렇게 지내다 혼자 쓸쓸한 노후를 맞이하면 어쩌지 싶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다시 혼인 관계라는 법적인 관계로 묶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상황이 주는 복잡함. 재혼 가정이 앉고 있는 여러 가지 예견되는 문제에 또 빠져 그동안 겨우 겨우 극복해 냈던 어려움에 봉착하고 싶지는 않았다.
독점적인 누군가와 교류하며 영원을 약속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함께 하는 동안은 행복을 느끼는 관계라도 맺고 싶었다가, 나란 사람은 그런 일시적인 관계에서는 행복과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빠진다면 그 사람의 몸과 마음과 현재와 미래까지 다 가지고 싶은 사람이기에 그런 가벼운 관계는 나를 불행하게 할 것이란 걸 잘 안다. 결국 결혼도 싫고 결혼을 염두하지 않은 가벼운 연애는 더 싫다는 모순.
사람을 만나고 싶지만 사람이 두려웠다. 관계를 시작하고 싶지만 영원을 약속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영원을 약속하지 않는 일시적인 관계로는 만족할 수 없다.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마음인지. 내가 봐도 이건 너무 미친놈 같았다.
대기업 혹은 공기업에 근무하며 안정된 연봉을 받고 있고 노후는 보장이 돼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전문적인 커리어를 구축해 놓은 전문직종, 혹은 이미 사업이 궤도에 오른 사업가나 자산가. 안전 자산으로 부동산 자산도 있어야 하고 내가 키가 크니 키도 커야 한다. 정량적인 조건은 그렇고 정성적인 조건을 따지자면 사람이 반듯하고 다정하여야 하고 취향은 깨끗하고 고급스러워야 한다. 자녀는 사춘기 시기를 지나서 내 자식도 아닌 남의 자식의 사춘기 질풍노도를 함께 겪는 갈등의 요소가 없어야 한다는 나의 말도 안 되고 터무니없는 요구를 소개자에게 부탁했을 때 이미 나는 그런 사람이 아마 없을 거란 걸 확신하고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내 마음속 깊이 아직 사람을 만나기는 이르고 나는 두렵다는 것을 전제하여 찾을 수 없는 유니콘을 찾아 달라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노련한 소개자는 그걸 실현시키는 사람을 나에게 대령했고 그 사람이 나에게 깊은 호감을 표시하자 나는 그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도 모르고 아직 어린 둘째를 감당하고 더 키워내야 한다는 핑계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걸 지켜본 친구는 나를 보고 너는 연애를 안 하려고 사람을 만나는 사람 같다 , 구십구 개를 갖춘 사람을 만나서 없는 하나를 찾아내고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도망쳐 버릴 거면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으니 힘을 빼지 말라고 조언했다.
나를 잘 알고 어렵고 고단했던 내 결혼생활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이혼이란 내 선택을 누구보다도 응원해 줬으며 그 이후에는 내가 사랑만 받는 연애 경험을 꼭 해보면 좋겠다고 , 내가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다고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던 내 친구가 그렇게 조언할 정도면 아마도 나는 모순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던 겁쟁이가 맞았었다.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며 번듯하고 훌륭한 신사들을 소개받았지만 그들이 다가오면 상처를 주고 내빼기만 했다. 아직 나는 준비가 안된것 같다고 변명하며.
그런데 돌아보니 그런 내 모습을 자각하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 다음 상태로 넘어갈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물리적인 거리는 아주 멀지만 감정적인 거리가 밀접하여 나를 너무 잘 알고 내 심정과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나의 두려움조차 알아채서 끊임없이 나를 안심시키고 이해시킨 이 사람 덕분이다.
물리적인 거리와 시차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해 나가려고 하는 시도. 이건 못나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내가 유니콘을 데려와라 하고 주장하던 것보다 더 비현실 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걸 실현시키고 있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는 감정의 안테나가 아주 큰 사람이다. 그는 정말 타인을 파악하는 것에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목소리 만으로 내 감정의 변화를 순식간에 눈치채고 감정을 표현하도록 독려해서 그에게 표현하며 결국 내가 내 마음을 깨닫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 그는 좋은 상담자이고 나는 상담자를 신뢰하는 내담자였다.
사람이 소통을 할 때는 언어적 소통보다 비 언어적 소통에 더 많은 정보가 있다. 표정이나 몸짓 눈빛의 변화 같은 것. 그런데 우리는 비언어적 정보를 알아차리려 노력할 필요도 없이 언어전달 만으로도 충분히 서로의 뜻을 전달받고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축복.
생에서 누려 본 적이 없는 축복. 어느 순간 나는 이 축복을 마음껏 누려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