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와 통화를 하다가 폭언과 욕설을 들었던 날 이후로 나는 시모의 번호를 차단했다. 그리고 자동 녹음 기능이란걸 찾아내서 설정했다. 그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날의 통화내용은 많이 잊었다. 디테일한 모든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가 폭팔하며 소리지르던 기억과 수화기 저 너머에서 그녀의 욕설을 더이상 들을 수 없어 어머님 저한테 이렇게 대하시면 안된다고 더이상 듣지 않고 끊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던 기억은 난다. 너무 놀라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저절로 눈물이 나오며 식은땀이 났었다.
며느라기라는 웹드라마를 보는데 나는 그 드라마를 우연히 지나가며 볼때마다 PTSD가 이런것인가 싶을 만큼 심장이 두근거려서 잘 못본다. 우습게도 그 시어머니가 그래도 내 시모에 비하면 교양있고 상식적이라는 비교가 든다는 것이다. 적어도 사린의 시모는 내 아들에게 뭐해먹이는지 보겠다며 아침일찍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거나, 며느리들을 비교하고 경쟁하시키며 잘하는 애한테만 돈을 주겠다는 소리를 하거나, 수가 틀리면 며느리에게 폭언과 욕설을 퍼붓지는 않으니까?
시부모와 인연을 끊지 않으면 나는 죽을것 같았다. 당신이 실업자가 되더라도 나는 더이상 그들과 왕래를 못하겠다고 남편에게 선언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이자 더이상 남편도 니가 잘해야 엄마가게를 내가 물려받지! 지금 동생네 부부도 그 알짜 가게 물려받고 싶어서 안달인데 제수씨는 엄마한테 입안의 혀처럼 굴며 얼마나 잘하는데? 같은 등신같은 소리는 못하고 한발 물러났다.
나는 시부모와 인연을 끊었지만 애들과 남편은 왕래를 지속하였다. 명절에는 애들과 남편만 보내고 나는 친정을 가곤했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했다. 내가 했던 선택(결혼해서 시부모의 사업장을 물려받으면 시모의 호언장담처럼일을 안하고 편히 돈벌수 있으니 다니던 직장과 연고지를 버리고 시댁 근처로 내려가 사업장을 물려받자)과 내가 추구하던 가치에(시부모에게 종속되더라도 돈만 많이 벌면된다) 의해 그런 삶을 살았는데 사실은 물질도 누리지 못했을 뿐더러 누군가에게 종속되서 누군가의 뜻데로 꼭두각시 처럼 사는건 너무나 괴로웠었다.
하지만 사실 시부모나 남편이 나를 납치했던 것도 아니고 내가 선택했던 결혼이고 인생이였기에 누굴 원망하거나 억울해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결혼하고 보니 남편이란 사람이나 시부모란 사람이 내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더라도 당장 이혼을 하고 내 인생에서 그들을 도려내기엔 많은 것들이 얽혀있었다. 무엇보다 그당시 나는 힘과 에너지가 없고 물정을 너무 몰랐었다. 내 주변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친정은 멀고 마음을 나누고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도움과 조언을 받을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 내가 일을 하고 있을때 어린 내 아이를 돌봐주며 위험한 순간에 처하지 않게 조력해 줄 사람. 그 누구도 없었다.
그때 나는 시부모와 왕래를 끊고 진짜 내 사람들을 만들고 진짜 내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몇년이 지난 지금, 내 인생에서 남편도, 시부모도 정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고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상황이 되고 난 지금의 나는 변했다.
화가 많이 났었고 억울하기도 했었고 어떻게 나에게 이런일이 일어나지? 하는 생각이 들때마다 나는 현실을 직면하기로 했다.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를 보면
이 세상에서 나만 외롭고, 나만 힘들고, 나만 피곤하고, 나만 희생당하다는 망령에 사로잡히면 사람의 영혼엔 오직 분노만이 남게된다. 외로워서 화가 나고 피곤해서 화가나고 남들이 행복해서 화가나고 마침내 나는 내가 싫어서 미칠듯이 화가난다. 는 구절이 나온다. 나는 나만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여겼다. 원래 산다는건 힘든일인데 어떻게 나만 안힘들길 바랬나? 그게 욕심이지.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모두가 주인공인 세상에서 나만 주인공이 아니라고 여길 필요없다. 절망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움직여야 한다.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뿐이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가르침을 받아 나는 움직였다. 그리고 변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옆에 있던 내 남편을 돌아봤다. 그 역시 지배적인 시부모에게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성인이 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자 그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가 바랬던데로 지배적인 시부모가 실제로도 많은 자산이 있어서 그 자산을 다 물려 받으면 좋았겠지만 인생이 그리 뜻데로 되지 않는다. 사실 그들도 이미 오랜 생을 살아오며 이룬것은 다 쓰고 남은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는게 밝혀졌고 더이상 자식들을 쥐고 흔들 동력을 상실한 상태라는걸 그냥 그대로 남편도 담담히 받아들이길 바란다. 그 역시도 지난 시간들에 너무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