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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안 한 변명

아버님의 장례식

by 언젠가

왕래를 안 하던 시댁과 다시 왕래를 하게 된 것은 시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부는 나에게 다정한 눈길 한번 말 한번 섞지 않으시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시부가 돌아가시고 나서 보니 막상 그렇게 많다고 떵떵거리던 자산은 한 푼도 남지 않고 오히려 홀로 되신 시모의 노후 준비까지 그다지 탄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 세월 동안 시모에게 잘 보이면 모피코트라도 얻어 입는다며 최선을 다하던 둘째 며느리가 태세를 전환하고 이혼을 선언하고 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난파선에서 제일 먼저 탈출하려 애쓰는 것 같아서 기묘했다. 같은 입장의 며느리로 이 집에 들어와서 우리가 힘든 순간 의지할 수도 있었을 건데, 그녀는 늘 나를 시부모의 재산이 한 푼이라도 더 나눠야 하는 경쟁상대로 여겼고 경계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의 힘으로 생을 해쳐 나가는 방법을 익히기보다는 남편을 통해 시모의 자산을 하루라도 빨리 물려받길 원했고 물려받은 자산은 빠르게 탕진하고는 또 끊임없이 남은 자산에 기댔다. 그러다 결국 더 이상은 기댈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탈출했다.

탈출의 순간, 둘째 며느리는 시모에게 그동안 살면서 느꼈던 부분을 다 표현했다고 한다. 아들을 제가정 하나건사할 만큼 능력을 제대로 키워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려줄 자산도 없으면서 그동안 왜 이리 며느리에게 갑질을 다 하셨냐고, 인생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왜 아들며느리에게 나한테 잘하면 내 재산 다 너 줄께를 시전 하며 기대하게 하셨냐고. 시부모는 나에게 했던 그대로 그들도 가스라이팅을 했고 그들은 그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인생을 살아갔었나 보다.


사실 나 역시 속이 시원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녀가 다 해주고 나갔다니 시원했다. 그러나 이제는 시모도 예전의 그 태산같이 거침없는 시모가 아니고 늙고 불쌍한 노인일 뿐인데 그렇게 마지막까지 시댁에 무언가를 기대하지 말고 동서 니 스스로 살길을 찾고 뭐라도 해보려고 노력했어야 하지 않느냐 반문하고 싶다.

세상에 전업주부를 하라고 누가 발목을 꺾어서 들어앉힌것도 아닌데 남편이 벌어오는 돈만 쓰며 그 어떤 시도나 노력도 하지 않은 채로 그 돈이 작으니 더 받아오라고 괴롭히다 결국엔 털어도 더 이상 나올 게 없는 남편과는 헤어지겠다고 하며 그의 모친에게 소리를 지르는 건 사실 동서에게도 문제가 있다. 그리고 둘째네 부부는 늘 시모가 내건 미끼를 받기위해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기에 금전적인 도움을 우리 부부보다 더 많이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그들은 시부모가 요구한데로 세상의 모든 기준을 시부모에 맞추고 나에게 잘하면 내돈 다 줄께를 철썩같이 믿고 부모의 자산을 요구하기만 했을뿐 스스로 일어서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못했다.


나는 어떠한가 나 역시 시부의 장례식 이후로 사실 많은 부분에서 허탈함을 느꼈다. 시부가 생전에 장손을 준다며 아직 말귀도 못 알아듣는 어린 나의 큰 아들을 붙잡고 할아버지가 이거 너 줄 거다 이 집은 니 거다 하며 큰소리치셨던 5층 건물은 사라져 버렸다.

시댁과 왕래를 안 한 사이에 그 건물은 진작에 팔려서 콘도 회원권이나 골프 회원권 같은 걸로 분해되었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임상 실험 단계인 실험적 비급여 항암제 등으로 사라졌다.

적어도 내가 우리 아파트를 지키기 위해 친정엄마에게 빌린 금액 정도는 물려받을 수 있다고 헛된 희망을 품었던 순간도 있지만, 결국 어쩌면 홀로 남은 시모의 노후까지 걱정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자 결혼 이후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부유감이 사라졌다. 결혼은 도피도 아니고 구원도 아니다. 20년 전의 나는 내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겨서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고 그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에 방점을 두고 결혼을 결심했다. 나 역시 그당시에는 그 방점을 찍었던 원동력이 시부모의 자산이라 여겼다. 돌아보니 나는 부족하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에 늘 옳은 결정을 했고 그 결정을 현실화 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할 만큼의 힘이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엉망진창이 된 상황이라도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단정히 단정히 펴고 펴서 다시 살아갈 용기와 힘이 있다. 그런데 왜 나는 늘 내가 약하다고 생각했을까? 왜 그렇게 까지 스스로를 믿지 못했을까?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시부모나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화풀이가 아니다. 내가 겪었던 일들은 소설같고 기가 막히지만 약한 자아를 가진 사람, 자신을 더 먼저 믿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겪을 수도 있는 일이다. 세상에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만큼 단단하지 못한 사람을 기가막히게 알고 파고들고 조종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런 관계는 끊어내야 한다. 특히 나를 자신의 뜻데로 조종하려 하면서 그 댓가로 돈이나 재물을 약속하는 사람과 맺는 관계는 나에게 치명상만 남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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