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류작가 강은영 Sep 18. 2021

명절의 추억

초보 며느리 성장기

스물여덟 살에 결혼한 나는 전기밥솥에 밥만 겨우 할 줄 아는 요린이였다. 요리를 못하고 며느리로서 책임감이 부족했던 신혼 시절에는 명절이 참 싫었다. 낯선 시댁에 가서 일하는 것도 힘든데 친정에는 가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충청도 우리 집에서 시댁인 강원도에 간 후 친정인 전라도까지 갔다가 다시 우리 집으로 온다면 명절을 차에서만 보내야 하기에 애초에 친정은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결혼 후 3개월 만에 처음으로 맞이한 명절인 설날의 일이다. 연휴의 첫날이 음식 하는 날이었는데 쉬는 날이라 늦게까지 뒹굴거리다 오후가 돼서야 시댁으로 출발했다. 남편과 단둘이 여행 가는 기분으로 즐겁게 가고 있는데 시어머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쯤 왔니?"

"좀 전에 출발했는데요?" 남편이 해맑게 대답했다.

"뭐? 집사람 위하는 짓을 잘도 한다. 일찍 와서 음식을 해야지 이제 출발하면 언제 오니?" 


전화기를 뚫고 들려온 어머니의 말에 순간 얼음이 되고 말았다. '아, 나는 찍혔구나!' 그때부터 여행길이 아니라 도살장에라도 끌려가는 듯했다. 겨우 눈물을 참고 있는데 친정 엄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고 목이 메어서 말을 할 수 없었다. '엄마한테 가고 싶다. 가서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잠이나 실컷 자고 싶다.' 아직 철없던 며느리는 시댁에 가기가 너무 싫고 서러워서 울음을 삼켰다. 



시댁에 도착 후 다행히 시어머니는 별말씀이 없었고 나에게 나물을 볶는 일만 시키셨다. 너무 늦게 도착해서 음식을 이미 다 해놓으신 거였지만. 양념을 얼마나 넣는지 어떻게 볶아야 하는지 몰랐기에 짜디짠 나물 3종 세트를 만들어냈다. 한 입 먹어보니 '망했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맛이 형편없었다. 뭘 하든 열심히 하고 잘해서 칭찬을 받으며 살아왔던 28년 인생에 최대 위기였다. 혼나지는 않았지만 나물 하나 못 만드는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한테 미리 물어보는 건데 음식을 할 생각도 못했던 나의 과오였다.    


그날 밤, 밥을 먹은 후 설거지를 해야 했고 다 같이 술을 마시는데 밖에 있는 담금술을 몇 번이나 가져와야 했다. 며느리가 이런 대접을 받는 거라면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려고 세수를 할 때 종일 참았던 울음을 쏟아냈다.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부르며 엉엉 울고 나니 얼굴만 봐도 좋아 죽겠던 남편이 너무 미워서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동안 너무 곱게 자란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친정에서는 음식은커녕 설거지나 청소를 해본 적이 없고 엄마가 밥을 먹다가도 일어나서 내게 물을 가져다주는 모습이 남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고 한다. 나는 공주였고 엄마는 시녀였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동안 엄마를 도와주지 않은 것이 무척 후회되고 가슴이 아팠다. 결혼을 하고 며느리가 되어 보니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오늘 밤 우리 가족은 홀로 계신 시어머니와 명절을 보내기 위해 강원도로 출발한다. 며느리 16년 차인 나는 예전처럼 명절이 싫지가 않다. 요린이가 요리왕이 되었으니 알아서 음식을 척척하고 새벽 기상이 일상인 덕분에 어머니보다도 먼저 일어나서 차례상을 준비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산더미 같은 설거지도 엄청난 설거지 내공으로 순식간에 해치운다. 친정에 가지 못하는 건 아직도 아쉽지만 LA 갈비와 용돈을 보냈고 지난달에 엄마를 본 것으로 위안을 삼아 본다. 


결혼 후 수많은 명절을 보내면서 나도 참 많이 성장한 것 같다. 집안일은 하찮은 일이라고 여겼던 공주님이 시댁에서 하찮은 심부름을 자진해서 하고 친정에 가면 나서서 일을 한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던 초보 며느리와는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가서 즐겁게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은 양가 어머니들한테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 나이가 들어가는 그분들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도 기분 좋게 시댁으로 향한다. 명절이어서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 아니라 홀로 외롭게 명절을 보낼 시어머니를 위해 가는 것이다. 음식을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도 '젊고 건강한 내가 한다. 외며느리인 내가 이 집안의 명절을 책임진다'라는 생각으로 한다. 억지로 하거나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고역이다. 하지만 내가 선택해서 하면 더 즐겁고 아무리 힘든 일도 이겨낼 힘이 생겨난다. 


자, 당신도 며느리라면 나와 함께 뇌를 속여 보자! 


나는 명절이 좋다
나는 시댁에 가는 것이 무척 행복하다

    


  이렇게 뇌를 잘 속이면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명절을 보낼 수 있다. 이제 나는 정말로 명절이 좋다. 

이전 07화 뇌를 속이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