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퇴사 당일이었다.
아침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사내 메신저로
그동안 연이 있었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팀장에게는
퇴사 당일까지 정상 근무를 하고 싶다고
미리 이야기했다.
다른 퇴사자들은,
보통은 점심시간 전후로 사무실을 떠나고는 했지만
나는 평상시처럼 퇴근하면서
회사를 떠나고 싶었다.
점심시간 후에는 가깝게 지내던 팀장들과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왜 이직하세요?"라고
솔직히 물어봐 준 어느 팀장이
오히려 고마웠다.
"꾸준히 고민했고, 이직이 좋은 기회였다."
이렇게 답했다.
마지막 날까지 실무들이 들어왔다.
다른 팀에서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들을
우리 팀에 요청한 일들이었는데,
그냥 내가 처리해 주는 게 더 빨라서 내가 직접 했다.
다른 팀 사람들도 그걸 알아서
퇴사하는 나에게 메신저로 업무를 요청했을 것이다.
오후 4시쯤 인사팀장이 면담을 요청했다.
사직서와 비밀유지서약서 작성을 위한 면담이다.
사실 상당히 중요한 시간이었다.
비밀유지서약서에 기재된 위약벌 금액이
내 퇴사에 대한 회사의 긴장감, 위기의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보 보안에 극히 예민한 이 회사는
팀장급들의 퇴사를 매우 중요한 문제로 여겼고,
퇴사자와의 법적 분쟁에 나서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사실 난 퇴사를 준비하는 내내
비밀유지서약서에 어느 정도의 위약벌 금액이
적혀 있을지 궁금했고, 한 편으로는 긴장되었다.
회사가 과연 나를 적으로 인식할까, 아닐까.
비밀유지서약서를 제시하는 인사팀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당연히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
그래도 절차는 절차라서."
그도 그럴 것이
이 비밀유지서약서 초안을 작성한 것도 나였고,
중요한 퇴사자가 발생할 때마다
비밀유지서약서의 문구를
미세하게 조정하던 것도 나였으며,
퇴사 이후의 모든 합법적인 감사 절차를
마련한 것도 나였다.
우선 비밀유지서약서 금액부터 본다.
서약서의 위약벌 항목에는
예상 가능한 최저 금액이 적혀 있다.
회사의 가장 비밀스러운 의사결정에 관여했던
나에게 이 정도 금액을 적어놓은 것은
회사는 앞으로 나와 긴장관계를 가질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련함과 안도감을 느끼며 모든 서류에 서명한다.
팀원들과 작별을 한다.
팀원 중 한 명은 조기 퇴근하는 날이어서
오히려 내가 팀원을 배웅한다.
오후 6시, 평상시처럼 퇴근하며 회사를 떠났다.
팀원 중 한 명은 사옥 외부의 주차장까지
따라와 준다.
특별한 말은 안 했다.
그냥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남자고 했다.
나와 그리 가깝지 않다고 느낀 팀원이었지만,
의외로, 가장 정중한 형태의 작별인사를
내게 해줬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특별한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퇴사를 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크게 없을 것이다.
새로운 회사에서는 새로운 문제가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난 안전하게,
다음 사이클로 접어들게 되었다. 안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