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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09. 2021

곰탕을 먹으며

기다리게 하지 않는 게 사랑인 것을


오래전에는 이따금 양을 넣고 곰탕을 끓였다. 여기에서 양은 소의 위 부위를 말한다.


소는 위가 4개인데 양은 소의 첫 번째 위다. 양은 자잘한 돌기가 나 있는데 짙은 갈색의 피막이 그 위를 덮고 있다. 피막을 칼로 벗기면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양은 근육 부위여서 익히면 기름기가 없고 담백하다. 피막을 벗긴 후 물을 붓고 푹 고면 그야말로 양곰탕이 된다.


그런데 이 피막 벗기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밀가루로 문질러 냄새를 제거하고 끓는 물을 부어 튀기듯 해가며 칼로 긁어야 한다. 식으면 잘 벗겨지지 않아서 손이 델 정도로 뜨거운 상태에서 벗긴다. 그러고 나서 오래 끓여야 하니 양 곰탕은 무척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만드느라 기운이 달려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껍질을 벗겨주는 정육점이 있는데…” 하던 기억이 난다. 최근에는 만든 적이 없다.


어버이날 식당에서 양 곰탕을 먹었는데 이곳은 양의 피막을 벗기지 않고 그대로 삶았다. 갈색 피막이 익으니 새까만 색이 되었다.


사택에 살 때 옆집에 갓 결혼한 남편 동료가 이사를 왔다. 얼마 후 아내가 아기를 가졌는데 입덧이 심해서 아무것도 못 먹는다 했다. 양 곰탕 끓인 게 있어 한 냄비 덜어 보냈다. 며칠 후 냄비를 씻어서 들고 온 그녀는 한 입 먹다가 속이 안 좋아서 모두 버렸다 했다.


곰탕을 먹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서운했던 마음과 함께. 양 곰탕 만드는 게 그리 힘들다는 걸 그녀가 알 리 없었다. 껍질을 벗겨보지 않으면 그게 얼마나 정성이 가야 하는 음식인지 알지 못한다.

식당의 곰탕은 빛깔이 거무스름해서 품위는 없었지만 장작불에 잘 익어 깊은 감칠맛이 났다.




남편과 나는 이날 아침 좀 이르다 싶은 시각에 시댁에 간단한 안부 전화를 했고, 오전에 아들의 문자 -용돈을 보낸다는 -에 고맙다고 얼른 답문을 보냈고, 딸에게 우리의 나들이를 전화로 신고하고 외출했다.

부모님도 우리도 아이들도 오늘 할 일을 오전에 모두 마쳤다. 부모님을 기다리게 하지 않았고, 우리도 아이들을 기다리지 않았다.


어버이날이어서 식당에는 가족 단위로 찾아온 손님들이 제법 많았다. 남편이 갑자기 등 뒤에 있는 할머니를 한 번 돌아보라고 내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돌아보니 머리가 하얗게 센 자그마한 할머니가 곰탕을 먹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아들의 팔이 쉴 틈 없이 분주하게 식탁 위를 오갔다. 할머니 손 닿는 곳으로 그릇을 옮기고 반찬을 숟가락에 얹어 주느라.


-저, 할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어 보이니?


남편이 묻기에 나는 다시 살그머니 곁눈으로 할머니의 나이를 추측해 봤다. 내가 저 정도 연세의 노인들 나이를 짐작하는 기준은 시어머님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데?


-100 세쯤?

-아니야. 그 나이면 저렇게  못 다녀. 고기도 잘 씹어 드시잖아.


-하지만 우리 어머님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데?

-그렇지! 그러니 우리 엄마가 무지 건강한 거야.

남편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어머님은 연세가 아흔다섯이지만 지난달에 높고 가파른 식당의 계단도 혼자 올라가셨다. 부축하려 했더니 손을 내저었다. 내려올 때가 되어서야 현기증이 나는지 며느리 팔을 잡았다.


-이런 곰탕이면 우리 엄마도 좋아할 텐데.

밥 먹다가 남편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핸드폰을 열심히 들여다봤다. 잠시 후.


-엄마 동네 근처에 있는 곰탕집을 찾았어. 다음에 가서 사 드려야지.


남편이 시어머님 이야기를 하는 사이사이 나는 돌아가신 내 어머니 생각을 했다. 생각이 재빨리 들어왔다 나가고, 나갔다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젠 아무도 없다. 어느새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어버이날이니 안부 전화를 챙길 일도 없고 매달 빠져나가는 돈에 이번 달에는 얼마를 더 보내야 할까, 고민할 일도 없다.

곰탕 맛있는데, 드실래요? 권할 어머니가 안 계신다.

사람들로 왁자한 식당에서 내 마음은 자꾸만 이 가족을 쳐다보고, 저 가족을 쳐다보며 가라앉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규칙을 잘 지켰다고 ‘면회 금지’라는 말 한마디에 그래도 만나야 한다고 말 한마디 못했을까? 기다렸을 텐데…. 우리를.


깨달음이 이제야 찾아온다.

기다리게 하지 않는 게 사랑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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