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현씨 Oct 28. 2022

잘 되고 싶은 마음

애들이 밥 먹다 흘려 놓은 밥풀을 기어 다니면서 줍다가 갑자기 짜증이 확 났다. 주기적으로 오는 '뭐라도 되고 싶은 병'이 도진 거다. 요 일주일 내내 증세가 아주 위중하다. 이 병이 도지면 머릿속에 계속 들어오는 생각이 있는데, 그 생각을 언어화해보자면 이런 거다.



이렇게 살다 죽겠구만.
맨날 식탁 밑에 떨어진 음식이나 치우고. 또 밥하고. 빨래하고. 애랑 실갱이하고. 이러고 살면 사는 게 다 뭔 소용이야.


나는 오은영 선생님 책에 오는, 인간은 존재 자체만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존재의 의의가치를 가진다는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드러나고 싶다. 8시만 되면 거리에 불빛이라곤 없는 이 깡시골에서!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게 너무 싫고 두렵다.

난 왜 이렇게 드러나고 싶까?

누군가를 위해 밥을 차리고 치우고 집을 정돈하는 게 정말 대단하고 큰 일인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세상의 오랜 세뇌 탓일 거다. 집안일을 전담하는 것보다 직장인이 되어 돈 버는 일이 더 가치로운 일이라는 류의 세뇌가 아주 단단히 박혀있다. 그래서 집안일이 많은 날, 몇 시간 빨래 개고 청소기를 돌리고 있으면 그렇게 짜증이 난다.

글을 쓰거나 학생을 가르치는 시간은 생산적이고 귀한 시간 같은데 집안일은 이상하게 시간 낭비 같다. 가사 노동, 말만 노동이지 무임금으로 그냥 내가 갈아 넣어지고 있다. 남한테 인정받자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돈은 나왔으면 좋겠다. 집안일은 외주 주면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데 내가 하면 똥값이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러면.

에라이 그게 뭐야.


오늘 오랜만에 만난 벗들에게, 부루퉁한 얼굴로 한탄을 늘어놓다 갑자기 현타가 왔다.


아, 내가 배가 불렀구나.

애들이 코로나 걸려서 아플 때는 애들 아프지만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내가 삶이 지금 편하구나.

부양해야 할 아픈 가족 없고, 가르치는 애들도 속 덜 썩이고 하니 배가 불러서 이러는구나.

매일을 그냥 살면 되는 것을.

결과는 내 몫이 아닌 것을.

마음아 앉아라 나는 그냥 오늘을 산다 그런 을 며칠 전에 쓰고서, 또.

병이 왔구나 병이 왔어. 살기 싫어 병이. 배부르고 등 따실 때 오는 병이 도졌구나.


가을빛 듬뿍 받고 은행잎 쌓인 길을 벗들과 걷고 나니 정신이 번쩍 난다.

가을도 이렇게 마지막 햇빛을 뜨겁게 내리며 힘을 내고 있는데.

아직은 이 가을을 몇 번이고 더 맞이해야할텐데.

좀 있으면 연말 증후군(아이고 내가 올해 한 일이 뭐가 있나 이래 살아 뭐해 등을 주워섬기게 됨)이 도질 텐데.

정신 차리자.

아직은 이럴 때가 아니다.


잘 되고 싶은 마음, 그 마음.

그건 그거대로 두고.

나는 오늘의 그릇을 윤이 나게 씻자.

싱싱한 상추가 담겼던, 갓 지은 밥이 담겼던, 닭조림이 담겼던 크고 작은 그릇을 수세미로 빡빡 문질러 씻자. 그게 오늘 하루 잘 살았다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증거가 되어 줄 거다.



작가의 이전글 그냥 오늘만 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