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맨 01
4교시 수업 종료령이 울린다.
아이들은 콧김을 푸르르 뱉으며 앞발을 차다가 종소리가 나자마자 교실 뒷문 밖으로 튀어나간다. 경주의 승자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닌데도, 매번 점심시간은 교실마다 튀어나가는 이 분들의 경주로 복도에 우다다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다.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빈 교실, 딱 한 명이 차분히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연다. 매일 도시락이 왜 저럴까? 내 도시락과 비슷한 구성인데, 사이즈는 반도 안 되게 작다. 저걸 먹고 버틴다고? 그것도 저 장정이?
고구마 매우 작은 걸로 한 개, 달걀 두 개, 끝.
오전에 저지방 우유는 이미 먹어치웠다며 생수로 막힌 목구멍을 뚫어가며 찹찹 먹는다. 지난주에 비해 현저히 볼살이 빠졌다. 순식간에 티셔츠를 들추며 이제 거의 완성되어 간다는 복근을 자랑하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옆으로 돌려버리며 손사래를 쳤다.
“쌤, 이런 게 진짜예요. 눈바디 찍어두시라니까요. 볼살이 문제가 아니에요.”
“됐거든, 뭐야 이게? 극한의 다이어트잖아. 네가 뺄 살이 어디 있다고?”
“저, 이제 3주 남았어요. 딱 기다려요, 제가 트로피 가져올 테니까.”
“내기했어?”
“쌤, 저 이래 봬도 미스터 코리아 나가거든요? 몰라주시네.”
응, 몰랐다.
우리 반 반장, 사회성 하나는 끝내준다며 선생님들이 입을 모았던 사교의 왕, 전교의 모든 비밀 아닌 비밀은 다 우리 반 반장을 통해 들을 수 있고, 누구네 집 강아지가 집을 나간 지 정확히 17일째가 되었다는 둥의 아무 쓰잘 데기 없는 실화까지 불필요하게 듣게 되는 통로. 그쯤 되면 무슨 별명 하나 붙을 것도 같은데, 아이들은 아무 수식이나 별명 없이 그저 이름 그대로 투명하게 ‘찬이’라고 불렀다. 그런 찬이에게 드디어 처음으로 특이한 별명이 붙었다는 사실.
‘미스터 헬’, 헬스맨의 인생을 시작하며 붙은 별명치곤 세다.
지옥의 트레이닝을 감행하는 중이라고 ‘헬’로 줄여서 말하게 된 건데, 나중에는 자기 헬스장에 불러 모은 친구들에게 지옥의 훈련을 강요하여 친구들이 자기 허벅지를 부여잡고 진심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헬스장 나간 지 일주일 만에 친구 넷이나 끌어들여 같이 다니는데, 마치 몇 년간 헬스를 해온 사람인 것처럼 친구들에게 운동 요령을 가르쳐서 아이들이 하나 둘 쓰러져나갔다나? 나는 그런 근성에 존중을 담아 '씨(氏)'를 붙여 부른다. 미스터 헬은 내가 부르는 '헬씨'가 예쁘고 헬시(healthy)해서 좋다고, 역시 쌤이라며 반색했다. 소문 메이커답게 자기 헬스하는 것도 뻑적지근하게 소문을 내며 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가 '미스터 코리아' 대회에 나가는 건 나도 처음 알았다.
찬이가 도시락을 꺼내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헬씨, 도시락 이거 매일 누가 이렇게 싸주니?”
“싸주긴 누가 싸줘요? 제가 직접 싸와요.”
지나치게 활달하고 모든 상황에 텐션이 높아 주변을 피곤하게 하는 이 말 많고 행동 부산스러운 찬이가 당차게 올려다보며 대답하는데 내가 너무 애기 취급했나 하고 잠시 반성하게 되었다.
“아침에 나오기도 바쁜데 점심을 준비해 오려면 밤에 다 삶아놓고 쪄놓고 해야겠네.”
“당연하죠. 제가 고구마랑 달걀 사다가 직접 다 해서 이틀 치씩 준비해놓죠. 저녁에도 먹으니까 금방 없어져요.”
“그럼 삼시 세끼 다 이렇게 먹어?”
“미스터 코리아는 아무나 나가는 줄 아세요? 이러고 운동 네 시간씩 해요, 쌤.”
“이제 중간고사 시작되는데, 공부는 좀 해야지, 운동만 그렇게 해서 어쩌냐?”
“제가 할 건 다 해요, 쌤. 딱 기다려요, 중간고사 제대로 보여드릴 테니까.”
얘는 뭐든 다 딱 기다리래. 무슨 자신감이야, 대체? 그래도 약속조차 안 하는 것보다 예쁘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쌤, 눈바디?”
“아니, 완성품을 볼게. 미스터 코리아 나가면 사진 찍어와. 과정은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굳이 실물 눈바디, 노노. 눈 버려.”
“흐흐, 인정. 완전체를 보여드릴게요, 커밍 쑨. 아우, 맛있다. 쌤, 굶어가면서 하다 보면 고구마가 얼마나 단지 몰라요. 으음~마시쪄~.”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오늘 점심은 너무 시무룩하다.
이젠 정말 물린단다. 도시락 뚜껑을 열어 놓고 멍 때리는데, 내 도시락을 가져와 구경시켜주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쌤, 이렇게 몇 년을 드셔도 다이어트 불가, 알고 드시는 거 맞죠? 일단 양이 틀렸어요.”
이 녀석은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하나? 잔소리 나불나불, 시끄러워 죽겠네.
“쌤, 소도 풀만 먹는 거 아시죠? 소 마블링 봐요, 풀만 먹어도 살쪄요.”
나도 알아, 근데 양을 줄이면 왠지 불안한 걸 어떡해, 이 먹성 때문에.
“근데 쌤은 안 질려요?”
“응, 별로 안 질려. 나는 저녁 때는 멀쩡한 밥 먹잖아. 심지어 맛있는 거 사 먹을 때도 많아.”
“전 정말 질려요. 오늘 확 사고 칠까 봐요.”
“참아, 참아. 대회 끝나고 나오면서 삼겹살 때려버림 되지.”
“안 그래도 맨날 대회 끝나면 뭐 먹을지 생각해요. 엄마가 삼겹살 사준댔어요.”
아, 엄마.
'엄마' 하니까 생각난 건데, 진짜 헬씨는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은 게 분명하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의 특징이 줄줄 흐른다. 온 사방에 관심과 촉수를 잔뜩 세우고 사는 이 아이는 정말 구김살이 없는 게 최고 장점이다. 이 해맑은 에너지야말로 뭔지 모르게 그늘진 구석들을 품고 있는 대부분의 아이들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헬씨만의 특장점이며 많은 아이들에게 동경과 사랑을 받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동경'이라고 말해놓고 나니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동경은 뭔가 다가갈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마음이라면 우리의 헬씨는 문턱이 낮은 편이라고 할까, 아이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별 같은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 툭 튀어나와 내 옆에 앉을 것만 같은 서민적인 친근감이 넘치는 존재이니까. 실제로도 참 자주 어디든 툭 튀어나와 참견하고, 어느새 뭔가 제안하며 모든 일에 자기가 없으면 안 될 같이 주도하고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중심이 되어버리는 인물.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 나오는 조정석 같은 성격이 학교에도 존재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 성품이야말로 바로 부모님으로부터 온 게 아닌가 싶다.
단지 DNA에 흐르는 유전적 성향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있다는 걸 확신하는 것 같은 당당함과 자신감, 어이없을 정도로 뭐든 자기 일인 것 같이 나서서 정리하는 결연한 간섭. 아무에게도 선을 긋지 않고 개방해둔 넉넉한 앞마당, 누구든 잠시 쉬게 품어주는 따뜻한 행랑채, 이 아이가 갖춘 다소 시끄럽지만 제법 넓은 마음의 평수. 볼수록 유쾌하고 신기하다.
그래도 사람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항상 반전과 새로움이 가득한 게 사람이고 인생인데, 어찌 학생이라고 뻔하고 진부할 수 있겠는가? 헬씨가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 아이의 전부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