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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평화 Feb 10. 2018

나는 '월급루팡'이 되고 싶다

격무로 졸도한 '노예', '월급루팡'을 꿈꾸다

앞으로 자네의 목표는 뭔가
회사 최초의 영업부문 여성임원이 되는 겁니다

대학 졸업 직후 입사한 첫 회사의 첫 회식 자리였다. 아마 나의 환영식을 겸한 회식으로 기억한다. (아닐 수도 있다.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부장이 건배사를 시키며 물었다. "앞으로 자네의 목표는 뭔가" "회사 최초의 영업무문 여성임원이 되는 겁니다" 옆에 앉아 있던 사수가 피식 웃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쯤 사수가 조용히 물었다. "구석에 앉아계신 차장님 어때보여?" '부인 대신 아이를 등하원 시켜야 한다'며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시던 분. 퇴근 시간 직전 주어지는 업무는 '내일 하겠다'고 수용하지 않던 분. 어떤이들은 '뺀질이',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눈을 떼구르르 굴렸다. "저렇게 살아야 하는거야. 짧고 굵게 말고 가늘고 길게" 그때는 그 말이 무엇인지 몰랐다.


저 '월급루팡'들만 짤라도

사람이 모인 곳에 뒷담화가 빠질 수 있나. 두번째 회사에서도 뒷담화는 적지 않게 이뤄졌다. '월급루팡(회사에서 하는 일 없이 월급만 축내는 직원을 일컫는 신조어. 월급도둑, 월급잉여 등으로 표현하지만 도둑의 대명사인 '루팡'을 붙인 이 신조어가 20~30대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됨)' 이라는 신조어가 번진 뒤(?) 뒷담화는 더 잦아지고 패턴도 바뀌었던것 같다. "아무개는 이러저러해. 그래서 월급루야" 기-승-전-월급루팡.


이들이 주장하는 월급루팡은 크게 두 부류였다. 업무시간에 일을 하지 않고 개인용무를 보거나 딴짓을 하고, 누가 봐도 명백히 업무성과가 저조하거나,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특히 아랫사람)에게 미루고 성과는 가로채는 사람들. 당연히(?) 월급루팡으로 정의됐다.


전자와는 조금 다른 이유로 월급루팡으로 정의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팀에 업무가 쌓여서 죽을 지경인데 '이기적으로' 예정된 휴가를 간다거나, 해도해도 줄지 않는 업무 때문에 모두 주말에 출근하는 '뻔뻔하게' 토일 주말을 모두 쉬겠다고 하거나, 주말에 일하는 내가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는데 '염치없이' 쉬는 사람이 전화를 안 받는 이들.


월급루팡들에 대한 뒷담화는 대개 이렇게 끝났다. "저 월급루팡들만 짤라도..."


자유롭고 합리적인 신입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개인적으로는 과로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은 퇴사 대신) 휴직에 돌입한 뒤 전자와 후자가 모두 '월급루팡'으로 매도되는 것은 부당하단 생각이 들었다.


전자는 '월급을 받는 만큼 일하지 않은 사람들', 좀 더 정확하게는 일을 떠넘기고 실제로 그 일을 한 사람 대신 월급을 받아가는 '진짜 강도들'이지만 후자는 '월급을 받는 만큼 일하는 사람들'이다. 좀 더 정확히는 노동법과 사규상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들이다.


회사도 결국 너를 위해서 다니는 거야. 네가 제일 중요해. 네 삶이 우선이야

나 역시 뭣모르고 '월급루팡' 딱지를 붙이며 동료들을 힐난한 적이 있다. 달을 보고 출근해 별을 보고 퇴근하며, 일주일에 6~7일을 일하는 나와 달리 정시에 출근해서 정시에 퇴근하고, 주말을 모두 쉬고, 퇴근 후에는 단톡방이 터지든 말든 아랑곳 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 이들을 미워한 적이 있다. 그들을 '프로답지 못하다'고 수차례, 수십차례, 아니 수백차례 욕했다.


하지만 내가 살인적인 업무에 시달렸던 것은 그들이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을 하고 휴가를 써서가 아니었다. 쏟아지는 업무에 턱없이 부족한 인력을 배정해주고, '월급받는 만큼 일하겠다'는 사람들의 넘치는 업무를 회사가 나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죽어라 일해도 인센티브가 없는 회사 인사정책 때문이다.


이런 조직에서 노동법이, 사규가 보장한 근로시간동안 일하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 그들이 '현자'이자 '승자'였다. 오히려 부당한 업무지시를, 몸이 부서질때까지, 쏟아지던 업무를 '프로'라는 (아무런 실익없는) 말을 들으며 꾸역꾸역 해냈던 '사노비'인 내가 '패자'였다.


3번의 번아웃, 2번의 응급실행 이후 휴직계를 내고 퇴근하던길, 지하철에서 한 선배를 만났다. 근무시간 내 주어진 업무만 하는, 실은 평소 내가 생각했던 '프로'는 거리가 먼, 어쩌면 '월급루팡'의 경계에 서 있다고 생각했던 그 선배를. 그가 말했다.

 

"회사도 결국 너를 위해서 다니는 거야. 네가 제일 중요해. 네 삶이 우선이야. 너를 망가트려가면서까지 일할 필요는 없어. 쉬는 김에 충분히 쉬어라.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까지"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았다. 맞다.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온몸이 부서져 가며 일한 나에게 남은건 '우울증'이었고, '번아웃' 이었다. "건강관리도 능력"이라는 일부의 뒷담화였다.


 

선배의 일갈 후 노예처럼 착취당하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입사 후 2번째 있었던 부서는 새벽 6시에 출근해 자정 혹은 새벽 2시쯤 퇴근하는 부서였다. 1년 반쯤 지났을까. 생전 처음 '하혈을 했다. 점심시간을 쪼개, 토요일에 병원을 다닌지 몇달이나 지났을까. 부서에 온지 2년째 크리스마스 이브날, 부서장의 전화가 왔다.


"세종지사 쪽으로 가야겠" 막 세종시가 조성될 무렵이었다. 열악한 근무 환경탓에 간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죄송한데 제가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을 다니는데 지금 세종에는 병원 등 기반시설이 갖춰지지 않아서 힘들것 같습니다" "암도 아닌데 뭘 그래"


'직원은 조직의 부품에 불과하다' 이 진리를 모르지 않았지만 체감하니 기가 막혔다. (어쩌면 그때 사표를 내는 것이 맞았을까) 당시 '제 일'처럼 부서장에게 강하게 항의했던 선배들이 없었다면 진즉 퇴사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지만, 사람으로 치유받고, 또 다시 조직에, 사람에 상처 받은 나는 다시 퇴사의 문턱에 다시 섰다.


갈림길에 서고 보니 만약 내가 회사로 돌아간다면, 목표는 '적당한 월급루팡'이다. 월급 주는 만큼 일하고, 일하는 동안 내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는.


누군가는 '모두가 노예처럼 일하는데 이기적으로 제 생활만 챙기냐'고 말할지라도, 일하다가 졸도하느니 뒷담화를 좀 듣는게 나을 것 같다. '쓰다 버려지는 부품'으로 '노예'로 사는 것보다 어떤 사람들이 욕하는 '월급루팡'이 나을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내게 배당된 업무 중 일부를 누군가가 떠안을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법정근로시간 준수를 요구하는, 법적으로 보장된 휴가를, 처리 가능한 업무량을 요구하는 사람(=나)의 문제가 아니다.


인력 충원없이 업무를 쏟아내며, 구성원들이 감당할 수 없는, 혹은 그 업무를 (기꺼이 혹은 어쩔수 없이) 처리하는 사람들을 죽도록 일하게 만든 조직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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