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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평화 Feb 12. 2018

내성적인 사람이면 안 되나요?

'외향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줄 알았다

교우관계가 원만하고 활발하고 학급일에 적극적이며

학생기록부에 나에 대한 평가에는 이런 표현들이 들어가 있었다. '활발하다', '적극적이다', '쾌활하다', '명랑하다' 틀린 평가는 아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을때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내 의견도 곧잘 말하는 축이었다. 나를 만난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곧잘 나를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은 그게 내 모습의 전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스스럼 없이 친구들을 사귀는 것 같았지만 다가가기 전부터 '거절당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항상 있었다. 내 말에 대한 상대의 반응에도 항상 민감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반응에 상처도 잘 받았다. 다만 이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나의 예민함을 드러내는 것이 좋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오랜 시간 본 친구들은 말한다. "우리 중에 니가 제일 마음 하자나", "겉으로는 센척 하는데 실은 하나도 안 쎄" 그런 말을 들을때 마다 흠칫했다. 실은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일할 때는 이런 내 '본성'을 들키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누구도 '내성적인 성격'이 나쁜 것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만 '활발함', '당당함' 등이 각광받는 사회에서 '외향적인 사람'이 돼야 한다고 무의식 중 학습된 것일까. 어려서부터 '내성적인 성격'을 숨기고 '외향적인 성격인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던것 같다. 실은 내가 내성적인 사람이라는 것도 최근에서야 알게 됐지만

혼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성격이예요(웃음)


자기소개서, 면접, 취업준비를 시작하며 스스로를 '외향적인 인간'으로 단단하게 포장하기 시작했다. '활발하다', '매사에 적극적이다', '호기심이 많다' 등으로 스스로를 표현했다. 면접때는 '적극성 자랑대회'에 나간듯 떠들어댔다.


내향적인 성격은...'신중함', '완벽주의적 성향' 등으로 포장했다. "사교성이 좋지만 깊은 관계는 신중하게 맺는 편입니다", "혼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성격이예요.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아서(웃음)" 실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하고,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성격을 포장한 것인데.


성격 자평을 잘 반영해 준 회사 덕(?)에 늘 사람들과 어울리는 업무를 했다.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 사람들과 관계를 바탕으로 성과를 내는 것이 주된 입무였다. 잘 통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벽 앞에 선 듯 답답한 사람도 있었고, 거듭된 거부에도 내 필요에 의해 끊임없이 관계맺기를 시도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휴일에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는 것을 꺼려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사람과 마주하는 것마으로 에너지가 급격히 소비되는 느낌이었다. 강남과 명동 등 많은 사람이 운집한 장소에 가면 서 있는 것만으로 피로가 몰려왔다. 언젠가 부터는 사람의 말소리를 듣는 것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출퇴근길 듣던 음악은 '실시간 인기 음악'은 팝송으로(영어 가사는 잘 안들린다...), 클래식으로 바뀌었다.


휴직 직전 반년은, 그래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계속 밀어내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만나려 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던 시간들. "니가 잘 하는 것들이잖아"라는 상사의 기대. 매일 이어지는 성과압박에도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외향적인 사람'이고, 사람들을 만나서 하는 일은 내게는 힘든일이 아니니까. 내가 만들어낸 새장 속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하는 그런 상황.


외향적인 성격이 좋은 것이고 내성적인 성격이 나쁜 것이 아녜요.
다른 것이지. 당연히 모두가 외향적인 사람이어야 하는건 아녜요


휴직 과정에서 받은 심리검사에서 '책임감이 강하고 예민한 성격으로 지지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감정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내향적인 성격'이라는 것도 함께 알게됐다. "힘들다", "못하겠다"는 말을 못한 이유를. 스스로를 '책임감', '프로페셔널함'으로 무장한 사람으로 철썩같이 믿었던(?) 탓에 조금 놀랐다.


감당할 수 없는 업무를 쏟아낸, 실적을 압박했던 회사의 잘못도 있지만, 그 부당함에 'No'라고 말하지 못한 나의 잘못도 있는 셈이다. '아픈만큼 성숙한다'는 말을 싫어하지만 (안 아프고 성숙할 순 없나? 피할 수 없는 아픔이라면, 그를 통해서 성숙하면 좋겠지만, 건강하게 성숙하고 싶다) 원하지 않았던 아픔으로 조금은 성장한 것 같다. 내성적이어도 괜찮다. 나도.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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