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평화 Mar 16. 2018

미워할 용기와 미움받을 용기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자신을, 누군가를 미워하는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자"

'벛꽃엔딩'이 음원차트를 지배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진짜 봄은 아니다. (내 기준은 그렇다) 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서늘함보다 향기로움이 느껴지는 걸 보면 꽃샘추위가 물러가고 봄이 오는 것 같다. 봄의 길목에 들어서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존경한다'고 생각했던, 하지만 이내 '증오'감정을 알게 해 줬던, 종국엔 '미안' 감정을 남긴 그 사람.  


선배님을 존경합니다.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2번째 부서에서 입사 후 정말 오랜만에 '배우고 싶은 선임'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실하고 열정적이었고 자신감이 넘쳤다. 어느 술자리에선가 "선배님을 존경합니다.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불행의 씨앗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열정적인 그는 쉼 없이 업무에 대한 조언을 했다. 업무시간까지는...그래...뭐(좋다치자) 부서 특성상 외부인과 술자리가 잦았는데 이르면 10시, 늦으면 새벽 1~2시에 술자리가 끝난 뒤 지친 몸을 질질 끌고 택시를 탄 뒤에도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을 때는 이래야 했다'는 류의 조언이 쏟아졌다. 쉬는 날도(거의 쉬는 날이 없는 부서였지만) 선임의 조언은 쉼이 없었다.


두 달쯤 지났을까. 새벽 2시쯤 술자리가 끝났던 것 같다. 그날도 택시를 타자마자 카톡으로 선임의 정성스러운 그날 술자리에서 내 행위에 대한 코멘트가 쏟아졌다. 그날따라 그의 카톡이 유독 갑갑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고민 끝에 열 글자 남짓을 적었다. "저...퇴근 후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귀가 찢어지도록 벨소리가 울렸다. 이후 통화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분노와 울분이 꽉 찬 고함과 욕설 등이었던 것 같다.


다음날, 아니 새벽 푸닥거리 후 대여섯 시간쯤 뒤부터 존경했던 그 선임은 증오하는 그 사람으로 돌변했다. 업무에 대한 쉼 없던 조언은, 끝없는 트집잡기로 바뀌었다. 자신은 내 보고라인이 아님에도 수시로 업무보고를 요구하는가 하면 연일 팀원 전체가 있는 곳에서 고함을 지르며 오타 등 (내 생각에는) 작은 실수를 책망했다.


내부망에 그의 이름이 보이면, 로부터 메신저가 오면, 그의 이름 중 한 글자만 봐도(이름이 '홍길동'이라면 '홍'이라는 글자만 봐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당신에게 배우고 싶다"는 내 말은 24시간 내내 엄마가 갓난아기를 챙기듯 돌봐달라는 것이 아니었는데...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가슴이 뛰는 내가 싫었고 나를 이렇게 만든 선임이 죽도록 미웠다.


꽃샘추위까지 물러간 어느 완연한 봄날, 팀원 전체가 함께 점심을 먹고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그는 그날도 카페에 있는 모든 손님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나질책했다. '한 두번도 아닌데'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만 좀 해라!" 팀장이 말했다. "앞으로 너는 막내한테 아무런 지시도 하지 말고 보고도 받지 마라" 그렇게 그해 봄이 지나갔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그가 회사를 떠난 뒤, 문뜩 그가 생각났다. 주요부서에서 누구보다 잘하고 싶었던 그가,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나름대로 챙겨준 후배에게 사실상 "더 이상 간섭말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느낀건 배신감 이었을까. 한참이 지나서야 그런 그를 미워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넘치는 후임 사랑을 서툴게 표현했던 그와, 넘치는 선임 사랑을 서툴게 밀어냈던 나. 어느 지점부터 어긋났던 것일까.


"이러다가 과로사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아니 "이러다가 자해를 해서라도 출근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하던 그 때, 일터를 떠나기 전까지도 참 많은 사람들을 미워했다. 이른 연차에 부장으로 승진해 매일 성과 압박하던 부장, 일 욕심은 많지만 그만큼 따라가지 못하는 본인의 업무 속도 때문에 자신의 업무를 은근슬쩍(막판엔 대놓고) 내게 미뤘던 팀장. '정.말.로.지.쳤.다'는 말에도 꿈쩍 않는 인사권자, 태업으로 종국에는 자신들의 일이 다른 팀인 나에게로까지 넘어오도록 만든 '월급루팡'들까지. 지긋지긋했다. 모두.



발소리에도 가슴 떨리게 만들었던 그를, 어느 순간 이해하게 된 것처럼, 버스를 타고 가던 중 불현듯, 미듯이 미워했던 그들이 떠올랐다. "내가 회사를 나간다면 저 부장, 저 팀장, 저 월급루팡들 때문"이라며 동기들에게 후배들에게, 친한 선배들에게 수백 번, 수천번은 험담을 했던 바로 그들이. '그들에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회사 내에서 비주류 부서를 전전하다 동기들보다 일찍 승진한 부장에 대한 험담은 회사 안팎에서 공공연했었다. '인사권자에게 잘 보여서 무능한 사람이 부장을 달았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런 그는 성과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에 힘들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팀을 이끌게 된 팀장 역시 선택과 집중을 할만한 여유가 없었을지 모른다. 내가 '월급루팡'으로 멋대로 규정한 사람들 역시 신입사원 때부터 그런 사람들은 아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 시작하자 그들에 대한 미안함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밀물과 썰물처럼 들어왔다 나가는 것이 아닌 해일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감정. 불현듯 쏟아지는 그 미안한 감정이 도무지 주체되지 않아 주치의와 상담 중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떤 감정이 드세요?" "미안함이요. 어쩌면 제 미움과 분노의 대상은, 인력과 업무를 제대로 배분하지 못해준 회사여야하는데, 엉뚱한 사람들을 미워한 것이 미안요"


"미운 그 사람들에게 어떤 행동을 하셨어요?" "그냥 뒷담화요" "그게 눈물을 흘릴 만큼 미안한 일인가요?" "제가 나쁜 평판조성에 기여한 것 같아서요" "환자분의 말로 나쁜 평판이 생긴 건가요?" "그건 아닌데... 제가 안 좋은 평판을 강화하거나 확산한데 기여한 것 같아서 미안해요"


"살다 보면 얄미운 사람들이 있죠. 험담도 좀 할 수 있고요. 그게 눈물을 쏟을 만큼 잘못일인가요?(웃음) 감정을 갖는 것 자체는 옳다 그르다 판단할 문제가 아니에요. 그 감정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출하는건 시비를 가리게 될수도 있지만요" 잔뜩 물을 먹은 솜을 등에 잔뜩 지고 있다가 바닥으로 털썩 떨어트린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분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아요. 누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요. 반대로 어떻게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 아무 이유 없이, 이유가 있다면 당연히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어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자신을,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자신을, 미워하지 마세요"


발가벗겨진 기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맞다. 나는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조차 스스로 억압했다면 자신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다. 대단한 수재는 아니었지만, 부모님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그럭저럭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굴곡 없는 삶을 살아온 내게 나를 포함한 인간을 둘러싼 '미움'이라는 감정은 가장 어려웠던 감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래, 내 마음인데 어때. 누굴 미워하든 사랑하든.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어떻게 하나. 나를 사랑하건 미워하건. 내게는 미워할 용기, 그리고 미움받을 용기 모두가 필요한가 보다.


이전 25화 "언제 다 나아?"...재촉해서 미안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