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로 무장한 호의는 정중히 사양합니다
나 원래 아침 안 먹어
입사 후 첫 부서 엠티 때의 일이다. 여러 잔의 술이 돌아가고 '엠티의 꽃'인 '야자타임'이 시작됐다. 한 신입사원이 "너(부장) 나한테 머리 어떠냐고 물어봤지? 머리 한 미용실 알려줘. 절대 안 가게"라고 포문을 연 뒤 나름 화기애애하게 진행되던 중이었다.
"야~ 나 원래 아침 안 먹어. 너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매일 아침을 사준다고 나를 데리고 가냐" 한 신입이 사수를 향해 날린 직격탄에 현장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미안해. 우리가 너무 일찍 출근해서 아침을 못 먹고 출근했을 것 같아서..." "자자~ 야자타임은 이 정도면 됐고..."
해당 사수는 야자타임이 끝난 뒤에도 당황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신입에게 재차 사과했다. 신입은 "제가 말씀드려야 했는데 기회도 없었고 선배가 좀 무서웠다"며 배시시 웃었지만 둘 사이의 어색한 공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선임은 후임을 생각해서 제 돈을 써가며 아침을 사줬겠지만, 자신의 호의가 상대에게 고충이 됐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엠티 사건(?)을 겪으며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것이 호의가 될 수도, 고충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사회생활, 특히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호의' 이름표를 단 고충을 심심치 않게 목도한다. 말하는 이의 의도와 무관하게 말이다. (어쩌면 호의의 주체는 다소 억울할지라도)
조직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특정 목적(일반적인 기업의 경우는 이익창출)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조직과 그에 따른 위계질서가 있는 조직에서는 윗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그 자체로 부담인 경우가 적지 않다.
후임들과 더 많은 소통을 하기 위한 식사는 설령 선임이나 부서장이 사비와 개인 시간을 털어서 진행한다고 해도 호의가 아닌 고충이 될 수도 있다. "어차피 먹을 밥 내 돈 주고 안 먹으면 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내 돈 주고 편하게 밥 먹고 싶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자신의 호의를 모두가 호의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이나 착각을 넘어선 오만이다. 상대의 의중을 읽으려는 노력, 배려가 없는 호의는 폭력이다.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하는 자신은 스스로가 기특하기 그지없겠지만 호의를 받을 의사가 없는 상대방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연애나 결혼, 출산, 육아 등 사적인 질문 또한 대개는 "상대와 소통하고 싶다"는 '좋은 의도'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연애 안 하니?", "결혼 안 하니?", "결혼했으면 아이를 낳아야지" 등의 질문을 하는 사람들 중 진정으로 상대의 안위를 생각해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결혼하고 싶은데 돈이 없네요", "갖고 싶은데 (아이가) 안 생기네요"라는 답에 허둥지둥 자리를 뜨는, 스스로에게 '소통하는 사람'이라는 셀프훈장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말과 행동은 아무리 좋고 선한 의도라도 해도 오만한 오지랖에 불과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좋은 의도로 가득찬 말과 행동을 해온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다. 입을 열기 전에 귀를 열고, 손을 내밀기 전에 눈으로 상대의 얼굴을 한 번 읽어보라고. 그리고 나는 자기애로 무장한 소통의 행태들, 그 호의를 정중히 사양하는 법을 익혀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