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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평화 Jul 03. 2018

모든 인내가 가치있는건 아니더라

기꺼이 수용하는 견딞은 굳은살로 남지만 고통스런 견딞은 상처만 남기더라


바이올린을 떠올리면 손가락 끝에 잔뜩 반창고를 붙인 단풍잎 만한 손이 떠오른다. 사촌 동생은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켰는데, 피부가 약한 작은 손으로 바이올린 현을 계속 누르며 연습을 하다보니 매번 열 손가락 중 대여섯 손가락은 반창고 신세를 져야했던 것이다.


아직도 바이올린 연주를 보거나 바이올린을 볼때면 사촌 동생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손가락이 아프면 좀 쉬었다가 켜라"는 말에 "재미있다"며 해사하게 웃던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첼로를 배운 뒤 반창고를 붙이면서까지 연습을 했던 사촌 동생의 마음이 아주 조금 짐작이 갔다. 동네에는 없는 연습시설과 대여악기까지 갖춘 첼로학원에 가기 위해 거의 매일 버스를 타고 30~40분(편도)을 이동한다.


물론 내가 연주하는 첼로에선 음악소리 보단 쇳소리가 더 많이 나지만 그 거친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동 시간만 1시간이 넘어서 연습은 대개 1시간 이상을 하는데,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네번째, 다섯번째 손가락 끝에 힘을 잔뜩 줘서 현을 누르는 지라 연습이 끝나면 손가락에 근육통이 오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된다.


최근에 인지했는데 손끝에 굳은 살도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손가락 끝에 반복해서 힘을 주는 경험이 일반적인 경험은 아닌데다 네번째와 다섯번째 손가락에 집중해서 힘을 주는 일 역시 생경하다보니 처음에는 낯선 철줄(현)의 향기에 놀란 손가락 끝이 벌개지고 그 욱신거림을 오랜 시간 간직했드랬다.


이후 현을 손가락을 누를 때마다 아픔이 이어졌지만 생전 처음 현악기를 배우는 기쁨이 뽕맞은 듯 아픔을 상쇄하더니, 시간이 흘러 굳은살이 자리잡게 됐다. 행복한 아픔을 견뎌 굳은살이 생긴 뒤에 좋아졌던건 당분간은 아픔없이 기쁨만을 누릴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내일 아침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들었던 그 시절, 이성은 '고통을 견디면 결실이 있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 고통을 견디는 것이 가치있는 행동이라고 믿으며. 하지만 오랜 견딞의 시간이 지난 뒤 무조건 인내가 반드시 성장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단 사실을 알게 됐다.


스스로가 기꺼이 감내하는 고통(예를 들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나 병든 가족을 보살피는)이라면(설령 당시에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스스로가 납득 가능한 견딞이라면) 그런 믿음이 일견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의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를 '인내는 곧 성장'이라며 무식하게 견뎠던 내 행위가 그와 결이 같다고는 볼 수 있을지. 물론 선생님은, 어른들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며 언제나 내게 직면한 고통을 무조건 감내하라고 조언했었지만.


불행하게도 학교에서 배웠던, 어른들의 조언들과 달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0여년 동안 이어진 삶에서 내가 귀납적으로 결론내린건 직면한 모든 힘듦이 가치있는 결과(보상)로 귀결되진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내게 인생 선배를 자처한 어떤 어른들은 '요새 젊은이들이 참을성이 없다'며 시도때도 없이 공자님 말씀을 들이댔지만.  


공짜 경험은 없다고 모든 사람들은 짧던 길던 그가 지나온 삶을 통해 직면하는 고통이 가치있는 고통인지, 가치있는 미래를 위해 잠시 견뎌야할 고통인지를 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설령 경험의 한계가 있을지라도 적어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쌓인 정보로 현재 자기 시점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다(고 믿는다).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쉽게 견딞이나 인내를 조언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기꺼이 수용하는 아픔은 굳은살로 남지만 몸과 마음이 찢기는 고통은 큰 상처를 남긴다. 피할수 있다면 그런 고통을 억지로 감내할 필요가 있을까. 일등대학 어떤 교수님은 아프면 청춘이라며 힘듦을 견뎌내라 했지만 내 인생지도에 따르면 아픈건 병이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한다, 아픔과 힘듦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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