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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평화 Oct 06. 2023

죽도록 미웠던 상사, 실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었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거세할 용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쓰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아요

2019년 새해 첫날, 회사로 돌아갔다. 번아웃 증후군과 중증 우울증을 진단받고 회사에서 병가를 얻은 뒤 (정확하게는 업무상 재해로 산재를 신청하는 대신 업무 외 질병) 8개월 만이었다. 병가를 갈 때와는 다른 부서로 복귀했다. 새로운 부서는 월급은 조금 적지만 업무 시간은 적고, 돌발 이벤트도 거의 없는 부서다. 사내에서의 위치와 사외에서의 위상은 크게 낮아졌지만 한 번도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다. 복직을 하면서 다짐했던 것은 정신건강의학과 주치의의 조언 딱 2가지였다. 치료를 받은 지 다섯 해가 지났지만 이 2가지는 지금까지 마음이 흔들릴 때면 곱씹는 말이다.


'못 합니다'라는 말을 못 해서
병이 난 겁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든,
다른 자리를 찾아서 가든
물리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를 마주하면
꼭 '못 하겠다'라고 말하세요.
그래야 다시 아프지 않아요.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달려간 일터에서 가장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 한동안은 진료실에서 온몸에 있는 수분을 모두 짜내듯 눈물을 쏟기 바빴다. 주치의는 크고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지긋히 바라보거나 몇 가지의 질문, 몇 마디의 위로를 더하는 것이 다였다. 주 2회 진료가 주 1회 진료로, 격주 진료로 점차 줄어들 때쯤 주치의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직후엔 발끈했다. "못 하겠다고 말을 못 한 게 아니에요! 업무에 대한 이해도도 없고 바보 같은 지시를 하는 윗사람과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무리한 일이지만 보란 듯이 해낸 겁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주치의 말이 맞았다. 입엔 불만을 달고 살았고 동료들과 마주할 기회가 있으면 뒷담화를 하기 바빴지만 결과적으론 아무리 무리한 요구라도 제안이든 지시이든 강압이든 주어진 업무는 말 그대로 '꾸역꾸역' 해냈다. 부족한 시간과 바닥난 체력에 허덕대면서도 늘 어찌어찌해냈다. 돌아보면 불만스러워 보이지만 결국은 해내는 그 모습에 무리한 업무 지시와 요구가 이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주치의의 말은 상사가 잘했다, 내가 잘못했다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을 긋는 귀한 조언이었다.


중간관리자의 위치로 오자 당시 상사의 모습도, 주치의의 말도 모두 곱씹게 된다. 내 앞에 2명의 후임이 있다.  업무 지시를 했을 때 뺀질뺀질해서 업무 로드가 많아 보이지 않는 A는 업무 성과도 그저 그렇고, 그마저도 계속 채근하지 않으면 일을 마감기한 안에 마무리하기 어렵다. 그 옆에 업무 파악 능력이 뛰어나고 센스도 있어서 일을 주면 이후에 별다른 추가 지시 없이 업무를 마무리하지만 이미 많은 업무를 떠안고 있는 B가 있다. 관리자 입장에서는 B에게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고, 뒤에서 좋지 않은 말을 들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B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조직 관리 측면에서 훨씬 효율적이다. 그래서 B에게 추가 업무를 주려고 하는데 B가 '현재 하고 있는 업무 로드를 감안하면 다른 업무를 추가로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담백하게 말한다면 관리자로서 다른 말을 할 도리가 없다.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못 하겠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기저에는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있어요.
내가 너무 싫어하는 그 사람에게도
결국 '얘는 일을 잘하는구나'라고 인정받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설령 내가 어떤 일을 해내지 못해도
'그 사람이 이걸 해내지 못한 건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라고 이해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내가 정말 어려운 일을 해내더라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거나
'당연히 해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하죠.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념하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잖아요.


숨이 턱 막혔다. 진료 초반을 제외하면 진료실에서 눈물을 줄줄 흘린 날은 손을 꼽았는데 이 말을 들었던 그날의 공기는 생생하게 기억난다. 뒤통수가 얼얼하고 코끝으로 온몸의 피가 쏠리고 눈으로 몰린 수분이 몰리더니 눈물과 콧물을 문자 그대로 '콸콸 쏟았다'. 번아웃과 중증우울증 치료를 받기 전보다 내 마음은 분명 단단해졌지만 회사 생활을 하면서 벽 같은 상황을 마주했을 때 주치의의 2가지 조언을 다시 마음에 새긴다.


번아웃을 마주했을 때 당시 상사는 죽도록 미웠지만 결과론적이지만 그 사람덕에 내 마음속에 다소 왜곡됐던 '사랑'에 대한 정의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거세한 뒤 나는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됐고,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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