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내 이름을 불러줘서"...후배와 밥을 먹으며
밥 한 번 먹자
함께 밥을 먹으며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거나 설교를 하는 상사들이 참 싫었다. 당사자들은 후배와 소통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듣기보다 말하기를 하는, 나는 거의 듣기만 하고 상대는 거의 말하기만 하는. 그 자리는 소통의 장이 아니었다. 식사를 마치며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속으론 '내 돈 주고 편하게 밥 먹고 싶다'고 말했다.
의례적 인사처럼 하는 "밥 한 번 먹자"는 말에 "네"라고 말하면 속으로는 '아니요'였다. "괜찮은 날짜 주세요"라고 하면 '네'였다. "네"라는 대답에 상대가 "날짜를 줘"라고 하면 별수 없이 밥을 먹었다. 대개는 쏟아내는 상대의 말을 들었다. "잘 먹었습니다"라고 하며 '편하게 밥 먹고 싶다'고 또 생각했다.
신조까진 아니지만 마음 속의 기준 같은 것이 있다. '내가 싫은 건 남한테 하지 말자'(물론 언제나 상대가 싫은 행동을 안 하는 훌륭한 인간은 아니다ㅠㅠ ) 후배들에게 "밥 한번 먹자"라는 의례적인 인사는 안 했다. 그 자체로 부담이 될지도 모르고 겉으로 '네'라고 말하면 나는 "언제 먹을래"라고 반응할 테니. 먼저 "선배~ 밥 먹어요, 날짜 주세요"라는 후배들과만 밥을 먹었다.
선배~ 우리 밥 언제 먹어요?
회사에서 마주할 때마다 "선배~ 밥 먹어요"라던 후배들이 있었다. 의례적 인사로 많이 하는 말이라 주로는 "그러자"라고 넘겼다. 다시 "날짜 주세요"라고 하면 그제야 밥을 먹었다. (생각해보니 '밥 한번 얻어먹기 드.럽.게. 힘든 선배'였다) 서로의 일정 때문에 2번이나 밥 약속이 취소된 후배가 휴직을 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연락이 왔다.
"선배~ 일 안 하셔도 밥은 드시죠? 저랑 밥은 먹으셔야죠?ㅎㅎ" "나 이제 돈 안 벌어서 밥 사준다는 사람하고만 밥 먹을껀데ㅎㅎ" 능청스러운 줄은 알았는데 집요하기까지 한 그놈이 되받아쳤다. "제가 어찌 선배께 밥을 사는 불충을ㅎㅎ" "가까운 김밥천국 찾아봐ㅎㅎ" 그렇게 일터를 떠나고 처음으로 후배를 만났다. 그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을 만나고, 회사 동기들을 만나고, 친한 선배들을 만난 적은 있었지만 후배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편해보이세요. 요즘 어떠세요?"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평범하고도 (직장인으로서는 꿈꾸기 힘든) 특별한 일상이라고 말했다. 퇴사를 생각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직을 선택한 이유도. "얼굴이 반쪽이 됐네. 너는 힘든가 보다" "일부러 살 빼고 있는데ㅎㅎ" "얼굴살은 마음고생하면 빠져" 그제야 자기의 상황을 하나 둘 풀어냈다.
네 탓이 아니야. 네가 부족한 것도 아니야.
후배는 회사가 자신에게 연차에 맞지 않은 높은 직책(그 직책은 팀장과 팀원 사이 조율자 역할과 업무를 배분하는 중간관리자 역할)을 준 것에 대한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또 '그 일을 자신이 잘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고민에 싸여있었다. 나는 회사가 그에게 그런 역할을 줬다면, 기존에 그 자리에서 해왔던 역할이 아닌 다른 역할을 기대하고 인사를 한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는 실무자 연차 이잖아. 회사가 그 직책을 네게 줬다면 실무자 역할과 해당 직책의 역할을 모두 하라고 준게 아닐꺼야. 설령 그런 의도라도 해도 그 역할을, 책임을 모두 해내지 못해도 네 탓이 아냐. 네가 무능해서는 더더욱 아냐. 너는 니 연차에 맞는 역할을 충실히 하면 되는 거야. 물론 잘 하면 더 좋은 거고"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후배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회사가 제게 실무자와 조율자, 중간관리자 역할을 모두 바란건 아닌 것 같아요. 제게 그 직책을 준 건, 실무자 역할과 조율자 역할만을 요구한 것 같아요. 제 욕심에 그 모든 것을 다 잘 하고 싶어서 더 스트레스를 받았나 봐요. 선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어요 팀장과 제 역할을 다시 상의해볼께요. 감사해요"
그날 밥값은 후배가 냈다.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에. '밥 사주는 사람과만 만난다'는건 농담이었는데, 네게 밥을 사줄 정도의 돈은 있는데...민망해서 "상담 값으로 네가 산거다"라며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후식은 샀지만 마음은 넘나 불편했다ㅜㅜ) 헤어지며 말했다. "밥 잘 먹었어. 고마워" "저도 밥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또 밥 먹어요 선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중략)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의 '꽃' 중-
그동안의 만남들은 대게 내 마음을 치유하는 만남들이었다. 친구들을 만나, 동기들을 만나, 선배들을 만나 힘듦을 토로하고 위로를 받았다. 명함을 꺼내지 않아도 되는 이 만남들은, 명함 없던 시절 만나 소통해온 사람들에 대한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후배와의 밥은 명함 없이도 내가 의미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안도감을 심어줬다.(아직 자신감이나 자존감이라고 하기엔...이른것 같다) 내가 어느 자리에 있는 누구이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기쁨. 물론 그 조언의 바탕은 10년간 사회생활, 벌판에서 뒹굴며 상처받고 그 자리에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는 동안 배운 것이지만.
휴직에서 머물지 퇴사로까지 이어질지 나조차도 아직 모른다. "이번에 인사가 나지 않으면 선배가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그 친구도 내가 휴직을 이어갈지, 퇴사를 할지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밥 먹어요. 연락드릴께요"라는 그 말을 해줘서 참 고마웠다. 그는 내게 위로받았다고 했지만 내가 그에게 더 위로받았다.
부끄러워서 하지 못한 말을 홀로 웅얼거려 본다 "고마워. 내 이름을 불러줘서. 나와 밥을 먹고 싶다고 말해줘서. 나와 밥을 먹어줘서. 네게, 또 누군가에게 함께 밥 먹고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