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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평화 May 26. 2018

화장하지 않아도 괜찮아

회사다닐땐 몰랐던 것들...'쌩얼'도 '교복(매일 같은 옷)'도 괜찮다


달보고 출근해 별보도 퇴근할때도 매일 밤 잊지 않고 하던 일이 있다. 화장지우기와 다음날 입을옷 골라놓기다. 밤샘 근무를 하거나 신문이 배달될때(새벽 4~5시?)쯤 퇴근해 오전 오프가 허락되지 않는한 아무리 늦게 퇴근해도 이 두가지는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클렌징하루를 마무리하는 리추얼(ritual)이었고 코디는 다가오는 하루를 준비하는 리추얼이었다.


꾸역꾸역 의미를 부여했지만 필요에 의한 행위들이었다. 피부가 워낙 예민해서(귀하게 자라지도 않은 주제에 예민하다ㅠㅠ) 화장을 지우지 않고 자면 며칠은 뾰루지로 고생을 해야하고, '1분만 더~'라고 외치는 몸을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겨우 질질 끌고 현관문을 나서기 때문에 아침에는 입고갈 옷을 고를 여유따윈 없었다.


피부 좋은 언니들이 한다는 2중세안 같은건, 롤링 같은건 언감생심. 샤워하는 김에 폼클렌징을 짜서 얼굴에 벅벅 문지르고 물로 세안한 뒤 다음날 입을 옷을 고르면 아무리 아무리 서둘러도 30분은 훌쩍 지나갔다. 가끔 '화장 안 하면 안 되나?', '아무 옷이나 입으면 안 되나?' 의문이 들었지만, 화장과 단정한 옷은 매너라고 생각했다.



10년 가까이 해온 클렌징과 코디가 의지이자 습관인줄 알았는데, 두 행위는 삶을 견디기 위한 리추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회사를 다닐때도 화장을 과하게 한 것은 아니지만 일을 쉰 뒤에는 친구와 약속이 있는 등의 '행사'가 없으면 스킨과 로션, 선크림이 사용하는 화장품의 전부다.


요즘 입는 옷은 상의 2개, 하의 2개, 요가복 2벌, 잠옷 정도다. H&M에서 산 여름용 니트 2개와 남대문 시장에서 산 와이트팬츠(라고 쓰고 '고무줄 통바지'라고 읽는다), 청바지와 운동할때 입는 요가복 2벌(매일 빨아서 2벌이 필요하다), 잠옷(이라고 해봐야 트레이닝 바지와 반팔셔츠)이면 충분하다.


일을 할때는 "어디 아프냐", "얼굴에 핏기가 없다"(주로 입술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날), "어제 밤 샜냐"(전날 너무 피곤해서 씻고 바로 잠들어서 버려서 전날 입은 옷을 똑같이 입은날) 류의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았는데 일을 쉬기 시작한 뒤 지난 4개월 동안은 비슷한 말 조차 한 번도 들은적이 없다.


거의 매일 운동을 하고 악기연습을 하러 음악학원에 가는데 매일 선크림만 바르고 가는 것은 기본이고 일주일 내내 거의 같은 옷을 입고 간 적도 있는데 말이다. 4개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거지?



분명 남성도 외모에 압력을 받고 있지만 이들은 외모보다 역량이 더 널리 인정받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남성은 특정 영역에서 성공하면 외모의 압박에서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그런 안전한 피난처가 없다. 한 여성이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외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똑같은 일을 하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외모적으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전 국무장관은 대중 앞에 안경을 쓰고 화장을 거의 하지 않은 채 나타났다는 이유로 뉴스 미디어 전반에서 비난받았다. 힐러리 클린턴의 머리가 흐트러졌다는 사실은 전국적인 이야깃거리가 됐다.

몇 년 전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 전 대통령은 캘리포니아주(州) 법무장관인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를 소개하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법무장관”이라고 소개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오바마는 먼저 카멀라 해리스의 능력과 사려 깊음에 대해 칭찬했지만 이후 그녀의 외모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여성은 능력을 보여주면서도 남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 러네이 엥겔른의 '거울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중-


지난날들을 떠올려보면 내게 화장이나 옷 등을 언급한 사람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직급이 높은 사람이었다. 너무 피곤해 집에서 미처 화장을 하지 못하고 조금 일찍 출근해 화장실에서 화장을 하고 나오는 모습을 보며 "서른 넘은 여자가 쌩얼로 다니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말한 사람은 여자 선임이었다.


예의와 예절, 품위 등으로 해석되는 매너와 에티켓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배려심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화장을 하지 않았다고 상대가 불쾌감을 느낀다는, 그래서 화장이 매너이자 여성직장인의 기본이라는 인식과 그런 인식에 지배당했던 나는 온당한 불편함을 감수한 것일까. 가치있는 견딤이었을까.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는 여성들이 모두 불필요한 강박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이 아니다. 매일 밤과 아침 졸음과 피로와 싸우며, 먼지만큼 남은 에너지를 소진해가며 화장을 하고 옷을 골랐던 나의 젊은 시간들이 의지보다 사회적, 문화적 강박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슬퍼서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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