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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 그대와 달

가을, 사랑의 끝에서 : 연작 (3)

by 헬리오스


가을밤, 그대와 달

가을, 사랑의 끝에서 : 연작 (3)



달이 떴습니다.

가을 달이 저 하늘에 조용히 걸렸습니다.

해가 서쪽 산마루를 넘어가자,

저 멀리 어둑어둑한 들판 위로

동그랗고 환한 가을 달이 기어이 떠올랐습니다.

누렇게 익은 벼 이삭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그 달빛에 은빛 물결이 일렁입니다.

익어가는 마을 어귀의 감나무도,

논두렁에 늘어진 강아지풀도

모두 그 달빛을 받아 반짝입니다.


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합니다.

여름 내내 뜨겁게 달아오르던 바람이

이제는 어느새 식어서,

볼을 스치면 조금은 쓸쓸한 기운이 묻어납니다.

그 바람 속에 그대의 이름이 흩날려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낙엽처럼 바스락이며 되살아납니다.


나는 달 하나 떴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이 허전한 가슴,

가을밤마다 달빛만 보면

괜히 허둥대며 소리 없는 말들을 쏟아놓습니다.

“그대여, 이 밤을 건너

내 그리움의 강가에,

저 달빛 따라 그대의 그리움도 와닿을 수 있을까. “

마치 달에게라도 그대의 소식을 물을 수 있을 듯,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멀어진 얼굴, 잡을 수 없는 손길,

그러나 아직도 내 입술에는

그대의 숨결이 남아 있습니다.

그대의 눈동자가 내 마음을 비추던

그 따스한 빛은,

밤마다 이 가슴을 은은히 적십니다.


가을밤은 사람 마음을 허물없이 만듭니다.

어둠이 내리고 달빛이 들판을 덮으면,

나는 그대와 함께한 작은 일들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비 오는 날 우산 하나로 서로를 가리며

발끝이 젖어가던 그 길까지.

모두 다 사소하고, 모두 다 평범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세상에서 가장 눈부셨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지금 나는 혼자 달빛 아래 서 있습니다.

가을바람을 맞으며,

저 멀리 논두렁을 따라 흐르는 달빛을 바라봅니다.

바람에 실려 오는 풀벌레 소리,

강가에서 들려오는 개구리울음,

이 모든 것이 그대의 목소리 같아

가슴이 저릿합니다.

이 작은 마을은 그대로인데,

그대만 어디론가 흘러가 버린 듯

텅 비어버린 내 마음만이 낯설게 남아 있습니다.


가을 달빛은 오늘도

내 그리움의 강 위에 잔잔히 비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강물은,

언젠가 그대에게 닿기 위해

조용히, 그러나 쉼 없이 흘러갑니다.


가을밤이 깊어질수록

내 마음도 더욱 깊어져,

그대 없는 세상에

그대의 흔적만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아, 그대여.

이 달빛 아래에서 만큼은

우리의 거리가 잊혀지기를,

그대가 다시 내 곁에 있는 듯

이 밤, 잠시만은 그렇게 살아도 좋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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