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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탕탕

20250330/일/맑음

by 정썰
#벛꽃

벚꽃축제엔 벚꽃이 없고, 내 차엔 기름이 없다.

난감한 하루.

오전 열 시에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으러 간다. 3주 만에 내려온 아들 녀석에게 점심으로 맛있는 건강식을 사 먹이고 오후 세 시 이십 분 차를 태워 보내야 하는 스케줄.

아침을 좀 일찍 먹거나 건너뛰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편이 좋았을 거다. 하지만 먹다 남긴 어제저녁을 버리기 아까워 작은 컵라면 하나 끓여서 해치웠다.

아내의 계획은 지난번 시간이 안 맞아서 지나친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대청호 벚꽃축제장에 가서 걷고 돌아오는 길에 시외버스 터미널에 아들을 내려주는 거였다. 식당에 가까워지는데 배는 꺼지질 않는다. 먼저 걷고 밥 먹자. 아침을 일찍 먹은 아내는 배가 고팠지만 주축 둘이 배가 그득하니 계획을 수정했다.

한참을 더 달려 도착한 축제장엔 꽃보다 사람이었다. 주차장에 차들은 가득한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꽃들은 아직이었다. 민망한 축제. 민망함에 먹거리 부스에서 번데기 한 컵, 뻥과자 두 봉지를 사서 식당으로 향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유등에 불이 들었다. 오던 길을 거슬러 기름을 넣고 가자는 아내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 평소 웨이팅이 길다는 식당이라 버스시간이 애매했다. 그대로 강행. 연료통의 빈 공간만큼 아내의 잔소리가 채워졌다. 외진 식당에 도착했을 때 마당에 사람들의 무리가 심상치 않다. 대기번호 37번. 조금 있으니 30번 대기팀이 불려 들어간다. 주변엔 다른 식당도 없어서 부족한 연료로 움직일 수도 없다. 침착하자. 화내지 말자. 전에 같으면 내가 꼬아버린 상황에 내가 엉켜서 화를 내곤 했다. 누가 봐도 내가 화를 낼 상황은 아닌데 그 상황이 화가 나서 화를 내는 민망한 시추에이션. 일단 생애 첫 긴급주유 서비스를 신청한 후 두 가지 방안을 아내에게 제시했다.

하나, 대기줄이 빨리 줄어서 밥 먹을 시간만 되면 서비스 연료만으로 터미널까지 최선을 다해 달려본다.

둘, 대기가 길어지면 예매를 취소하고 내가 안산 기숙사까지 태워다 준다. 일요일이라 버스표도 귀했다.

일단 대안을 정하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니 의외로 상황이 풀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33번, 34번, 36번이 기다리다 가버렸는지 차례가 예상보다 빨리 왔다. 이런 흐름이라면 밥을 먹고 가는 길에 주유도 가능할 거 같다. 인당 한상 씩 주문해야 하는 규칙에 따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에 서비스 기사님도 도착하셨다. 공짜로 받은 기름 3리터에 일단 든든해졌고, 받은 상은 고기 한 점 없지만 눈도 입도 즐겁게 했다. 정상적인 속도로 먹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추가로 주유하고, 터미널에 세 시 십칠 분에 도착했다.

아들은 학교 기숙사로 아내와 나는 커피숍으로. 생일 선물로 받은 기프티 콘으로 커피랑 작은 케이크 먹고, 끼니용 빵도 포장할 수 있었다.


한 때 우당탕탕 뒤엉킨 공기가 어느 순간 술술 풀려 평온을 찾는다. 살아온 나날들이 그랬던 거 같다. 그때마다 자격지심에 먼저 화내고 뒤에 자책했다. 사과에 익숙지 못해 그 불편한 앙금이 오래가곤 했다. 이제야 삶에 조금 익숙해지는 거 같다. 포기할 건 포기하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지난 일을 따지기보다는 앞으로의 해결에 집중하는 태도. 민망한 늦깎이다.


벚꽃축제엔 벚꽃이 없었고, 차엔 기름이 없었지만 남 탓과 화가 줄어 비교적 부드럽게 넘어간 하루에 감사하다. 아들은 잘 도착했고, 감기 바이러스는 강력한 수비에 포기하고 달아난 거 같다. 봄이 없는 3월을 비교적 잘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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