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렌 Aug 01. 2020

새벽에 이별의 문자를 받았다

  새벽에 이별의 문자를 받았다. 보름 간 잠수를 탄 그녀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만나지 않고 이대로 끝내자고 했다. J는 이별의 이유가 궁금했다고 한다. 그래서 찾아갔는데 만날 수 없었다. 며칠씩 연락이 되지 않는 날들이 자주 있었다. 그때마다 가슴이 바짝 타버렸다고 한다.      


  찾아오지 마세요. 전 나쁜 사람입니다.      


  이런 문자를 받은 건 며칠 전이라고 했다.      


  오늘은 비가 내린다.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어느 뜨거운 도시였는데 소나기가 오고 나서 바닥이 낮은 곳에 물이 고였다. 거기 소금쟁이가 앉아 있었다. 어디서 온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웅덩이를 지켜본 적이 있다.

  소금쟁이는 파문을 일으켜 이성에게 말을 건다. 나 어때, 나 괜찮지 않느냐고. 동심원의 물결을 저쪽 다리로 보낸다. 우리 사귀어 볼래? 잠시 고인 웅덩이에서도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있다. 소금쟁이의 사랑은 고상하고 우아하다. 물 위에 리듬을 만들어 멀리 떨어져 있는 암컷의 발바닥에 살살 간지럼을 태운다. 마음에 안 들면 언제라도 가 버릴 수 있는 먼 거리를 두고 마음을 열어 보려는 수컷의 부드러운 구애라고 할 수 있다. 마음에 들면 저쪽에서도 다리를 떨어 파문을 보낸다. 서로에게 감전되는 것이다.       


  비가 몸에 부딪치니

  목이 먼저 꺾이네요.     


  문자가 왔다. J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것 같았다.      


  형이 적었던 문장이 생각나네요.     


  혼자였는데

  다시 혼자라고 느낀다     


  아무도 읽지 않는 문장이라고 생각했는데 J가 읽고 있었다.      


  "새 책 말고 00씨가 재밌게 읽었던 책을 가지고 와요."     


  그런 말을 해서 J는 읽었지만 다시 함께 읽고 싶은 책을 가지고 여자를 만났다고 한다.    내가 보낸 책도 여러 권 있었다. 그 책은 이제 돌려받지 못할 책이 되었다. 나로선 나쁘지 않다. 내가 보낸 책이 사랑의 이야기에 피피엘로 사용되다니.

  그런 피피엘 하나를 손에 넣었던 적이 있다. 호치민에 가 있던 친구의 집에서였다. 그도 애인이 남기고 간 책 몇 권을 가지고 있었다. 헤어진 마당에 이제 그 책들은 소용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한권을 가져왔는데 그 책이 기가 막히게 재밌었다. 이런 책을 읽는 여자는 누구일까. 얼굴을 자세히 봐두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그 책의 제목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였다. 명랑한 그 소설을 따라 계속 걷고 싶은 밤이 생겼다.

  내가 준 책들은 어떻게 될까. 그 여자 분을 통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아니면 버려질까. 다른 곳으로 가기를 바라지만 그때의 소식은 내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나는 네 이야기가 재밌어. 펀(fun)이라는 뜻은 아니고 유익하다고 해야 할까. 나대신 연애하는 것 같아서 좋아."     


  J는 요즘 꽃을 키우고 있다. 아까는 내게 백일홍을 보내왔다.     


  "씨앗이 1미리도 안되는데 이렇게 큰 꽃을 피웠어요. 이 꽃을 선물하려고 했는데. 조화보다 생화가 아름다워요. 죽어가는 것이니까요."     


  J는 책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런 점에서 나와 같았다. 우리는 그 덕에 많은 이야기를 자주 할 수 있었다.      

  "근데 요즘은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길 꺼낼 용기가 생기지 않네요."     


  무슨 뜻인지 안다. 그는 대화가 가능한 사람과 여러 번의 연애를 했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연애를 해온 거네요."

  여자가 말했다고 한다.      


  "경제적인 풍요로움은 줄 수 없어도 정서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어요."     


  그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그가 키우는 민트를 떠올렸다. 비가 그치고 햇볕이 좋아지면 말려서 차로 만들어 내게 보내주겠다고 했다.     


  백일홍은 백일을 가는 꽃이다. 길게 피어 있는 꽃이다. 길게 가는 꽃 중에는 금잔화라는 꽃도 있다. 어느 나라에서는 그 꽃에 소원을 빈다. 이렇게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발자국이 남은 흙을 파내어 화분에 담은 후 금잔화를 심는다. 그러면 영원히 시들지 않는 자신의 마음이 꽃을 통해서 그에게 전달된다고 믿는다. 요즘엔 발자국이 남는 흙바닥이 없다. 그곳의 사람들은 이제 금잔화를 어디에 사용하고 있을까.      


  J에겐 하지 못한 말들이 있다. 나는 전하지 못할 말들은 가슴에 심어두라고 했다. 그쪽에서 혹시 연락이 올지 몰랐다. 몇 번이나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처럼 한 번 더 나타날지 몰랐다. 받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는 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나는 빗방울에 기도하고 있었다.      


  사랑을 잃고 바다로 간 어느 중국 시인이 모래 위에 써둔 시가 떠오르는 밤이다.      


  사랑을 하고 잃는 것은

  사랑을 아니 한 것보다 낫다     


  렛트는 스툴에 누워 나와 J의 통화를 듣고 있다. 우리의 만남은 조화가 아닌 생화처럼 유한하다. 렛트와의 이별은 렛트를 만나지 못한 것보다 멋진 일이다. 렛트와 연애한지 한 달쯤 된 거 같다.                     

이전 09화 놀랍고 아름다운 렛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