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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Dec 30. 2018

권력과 피

Morning of Execution of Streltsy, 218cm*379cm.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1881

권력의 역사


스트렐치(Streltsy)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존재했던 러시아군 부대명이다. 이름은 '사격수'를 뜻한다. 창설자는 '이반 뇌제'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이반 4세, 러시아 최초의 상비군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스트렐치 부대는 촌락민이나 상인들로 이루어졌는데, 이 부대가 전장에서 매우 효과적인 부대임이 입증되자 세습제로 그 지위가 유지되었다. 그 후 기존의 스트렐치 구성원뿐만 아니라 군역을 마치고 직업군인이 된 평민들도 스트렐치의 일부가 되면서 그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들 스트렐치 부대는 모스크바에 주둔하는 주력부대인 비보니예와 고로스키예, 그리고 지방 도시에 주둔하는 시립 부대로 나뉘었다.


이러한 스트렐치의 몰락은 표트르 대제가 실권을 잡으면서부터다. 표트르 대제(Peter I )는 어린 시절 황위를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에 의해 실권을 쥔 이복누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를 피해 시골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표트르가 성장함에 따라 소피아의 입지가 줄어들었고, 이에 위기를 느낀 소피아는 1689년 재차 스트렐치를 동원하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 기도한다. 이에 표트르는 어릴 적부터 친분을 가졌던 서유럽 출신 용병들을 이용하여 소피아의 친위 쿠데타를 힘으로 제압한다. 이후 모스크바 시내에 주둔하던 스트렐치의 주력부대는 모스크바와 멀리 떨어진 키예프 등 지방 도시들로 이전시키고 그 영향력을 차단하였다. 


하지만 오랜 세월 황실 친위대로 있었던 자신들을 내친 표트르에 분노한 스트렐치들은 표트르 대제가 1697년 서유럽으로 유학을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소피아와 손을 잡고 1698년 재차 봉기한다. 이것이 유명한 '스트렐치의 반란'이다. 이에 급하게 러시아로 돌아온 표트르는 이미 서구식 무기로 무장된 자신의 사병들을 이용하여(상대적으로 무기체계가 구식이었던 스트렐치) 그 해 8월 25일까지 스트렐치를 완전히 진압한다. 이때 표트르는 매우 분노하여 직접 스트렐치를 처형했다고 전해진다. 권력에는 항상 피비린내가 가득하다. 당연히 이복 누나인 소피아도 죽이는데, 그녀의 시체는 수습되지 않은 채 수도원에 버려져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반란을 꿈꾸지 못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 1698년, 스트렐치의 처형 장면을 바실리 수리코프는 거의 2백 년이 지난 1881년 그림으로 묘사했다. 물론 당시의 기록을 참고로 했는데 표트르 집권 당시 오스트리아 공사의 비서였던 코르브(Korb, Johann Georg)가 쓴 ‘모스크바 여행 일기’를 수리코프(Vasily Surikov, 1848~1916)가 읽고 상황을 연출하여 그린 그림이다. 


수리코프 역시 Peredvizhniki(이동 전람파)의 일원으로서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의 대표적 화가이다. 수리코프는 Krasnoyarsk (크라스노야르스크; 러시아 남부 시베리아 예니세이 강 하구 공업도시)에서 우편 국장의 아들로 태어나 1868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Imperial Academy of Arts에서 공부하게 된다. 수리코프는 카자크(우크라이나 일대와 러시아 서남부 지역에서 준 군사적인 자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동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민족집단) 계열로 알려져 있다.  


그림 한 편에 말을 타고 처형 장면을 지켜보는 표트르 대제의 표정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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