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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an 27. 2019

초상화의 시대

러시아 미술사

Ivan Nikitin, Peter I on his deathbed, 1725. 82 х 60,5cm Oil on Canvas, Russian Museum

이견이 없지는 않으나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황제였다. 반란을 제압하고 실권을 장악한 그는 모스크바를 버리고 서유럽을 향한 교두보인 상트페테르부르크(나중에 레닌그라드가 되었다가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뒤 다시 본래 이름을 회복했다.)를 새로운 수도로 정했다. 이때, 많은 건축가와 미술가가 동원되었다. 수많은 서유럽의 예술가들이 러시아로 초빙되어 새로운 수도 건설에 참여하였고, 거꾸로 유망한 러시아 청년작가들이 서유럽으로 새로운 문명을 배우러 떠나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표트르 대제는 여행을 하면서 원숙한 서유럽의 미술을 접했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교회에서 그려지는 이콘화가 미술의 전부였다. 그 당시의 초상화는 별로 그려지지도 않았거니와 파르수나(Parsuna-전통적인 이콘화와 사실주의적 초상화의 중간단계로서 인물의 부자유 스러운 자세와 표정이 성화처럼 엄숙하게 그려진 기법, 이진숙 저 러시아 미술사 참조) 기법을 따르고 있었다. 즉, 자세가 경직되었으며 감정표현이 부자연스러웠다.


이 시기의 대표적 화가가 바로 이반 니키틴(Ivan Nikitich Nikitin, 1690–1741)이었다. 그도 초기에는 파르수나 기법을 따랐으나 곧 그 경계를 넘어 다양한 자세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그가 그린 표트르 대제의 죽음을 그린 그림 (위)는 파르수나 기법을 넘어서고 있음을 볼 수 있다.



Dmitry Levitzky, Portrait of Catherine II, 1783. 261х 201. Oil on Canvas,  Russian Museum

그 후 러시아 미술은 초상화의 시대로 넘어간다. 드미트리 레비츠키(Dmitry Levitzky, 1735-1822)가 그린'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의 근대화 개혁이 얼마나 성공을 맺었는지를 보여준다. 레비츠키는 화가인 부친에게 기초를 배웠으며 키예프의 안트로포프(A.D. Antropov, 1716~1795)에게 사사한 후 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함. 1771~1788년 같은 아카데미 초상화 교실의 지도를 담당하기도 했다. 18세기 러시아 초상화가의 대표자이며 『에카테리나 2세』(1783,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림 속에서 여제는 위대한 계몽군주로 묘사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 등 위대한 군주가 이룩한 개혁의 최대 수혜자는 단연 귀족들이었다. 18세기에 귀족들은 황금시대를 맞이하였으며 또한 그들은 초상화를 즐겨 찾았다. 175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3대 미술 아카데미’가 최초로 설립된 이후로 근대적 미술 교육제도가 정착되면서 전문화가가 배출되기 시작했다.


표도르 로코토프(Fedor Strpanovich Rokotov, 1735~1808)도 그중 한 명의 화가였다. 로코토프는 모스크바 근교에서 농노(農奴)의 아들로 출생하여 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다. 서구로 유학한 적은 없었으나 러시아에 있던 외국인 화가의 작품을 연구하여 18세기에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모델이 된 인물의 인간적 매력을 부드럽게 융화시키는 듯한 포름(Forme- 사물의 형태, 선과 색의 배열, 공간의 구성 통칭하는 단어)과 섬세한 색조를 표현하였다. 대표작으로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의 초상>이 있다.



Vladimir Borovikovsky, Portrait of Maria Lopukhina, 179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Vladimir Borovikovsky, 1757~1825) 역시 이 시기의 뛰어난 초상화가였다. 그의 작품은 계몽주의의 위험으로부터 변질된 감상주의의 대표적인 그림이었다. 감상주의가 나타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루이 16세를 처형한 프랑스혁명은 유럽의 모든 군주들을 긴장시켰다. 따라서 계몽주의는 가장 위험한 사상이 되었고, 계몽주의 서적들은 모두 금서가 되었다.


출구가 막힌 계몽주의는 이내 그 본질을 망각하고 말랑말랑한 감상주의(Sentimentalism)로 변질되었다. 보로비코프스키의 '로푸히나의 초상'을 보면 이런 과정의 결과가 잘 나타나 있다. 그림 속 여성은 18~9세기 러시아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였던 귀족과 농노의 대립이라는 사회적 모순을 뒤로하고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던 태초의 순수한 자연 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평온함과 심지어 나른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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