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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Oct 15. 2016

일상과 여가(餘暇)

일상성, 그리고 철학


일상성의 핵심은 반복에 있다. 같은 곳에서 일어나 같은 곳에 다시 잠을 청하고, 같은 직장과 같은 업무와 같은 환경을 언제나 반복 경험하게 된다. '반복'이라는 것은 사실 근대의 산물이며 근대성의 징표다. 물론 근대 이전의 사회에도 '반복'은 존재했다. 하지만 근대 이전 사회의 '반복'은 개인의 의지에 따른 반복으로서 주체적 결정에 의한 스스로의 단련 과정이었으며, 그 반복으로 획득한 기술, 혹은 능력은 개인적 명예나 권력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근대적 삶 속에서 일상의 '반복'은 개인의 주체적 결정보다는 개인이 전체의 일부분으로 形骸化된 요소로서의 불가피한 반복의 대상일 뿐이다. 산업사회가 등장하고 근대화를 이룬 계기는, 동종 단일 상품의 폭발적 생산에 있다. 영국의 방적 산업으로부터 출발해서 미국의 포드 T형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산업의 모토는 단일 동종 상품의 확대 재생산이었다.


안토니오 그람시(구글에서 가져 옴)

단일 동종 상품의 확대 재생산의 절대적인 기반은 반복적 훈련을 통한 노동력의 확보였고 그것에 맞추기 위한 모든 개인들의 삶은 이 체제가 요구하는 “반복”을 수용해야만 했다. 이러한 반복은 근대 이전의 개인에 의한 개인의 주체적 혹은 의도적 반복과는 달리 노동자들에게 어떤 특전도 부여되지 않고, 오히려 반복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은 체제로부터 도태되거나 심지어는 추방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반복에 대한 강요는 당연히 일상성을 파괴하기도 하였는데,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표현대로(다소 과장되고 격앙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탈리아 피아트 자동차 공장의 반복 노동은 노동자의 삶을 문명 이전의 비참함으로 되돌려 놓기도 하였다. (잘 알고 있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서 노동의 반복이 주는 폐해를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근대의 반복은 사실 매우 경제적이기는 하다. 투입과 산출의 논리로만 보면 이러한 반복은 투입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고 동시에 산출을 기대 이상으로 증대시키는 가장 이상적인 노동 체제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근대화의 중심에 서 있던 자본들은 반복을 노동자의 시간과 임금에 중요한 변인으로 만들고 이러한 사실을 모든 노동자들에게 훈련이라는 방법을 통해 지속적으로 주입시키는 동시에 교육을 통해 그 과정을 강화해 나갔다.(그 속에 또 다른 반복이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반복에 익숙하고 숙련된 노동자들에게 인센티브를 줌으로써 개인적 성취감을 맛보게 하였으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근대 이전의 능동적 상황에서 오는 자아성취와는 현저히 다른 피동적 특혜 정도였고 동시에 노동자의 주체적 삶을 반복으로 제한하는 구속적 성질도 가지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하여 생성된 반복의 논리가 노동자들의 개인적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었는데 정해진 노동시간을 위해 개인적 일상을 노동의 반복성의 지침에 맞추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의 요건인 임금 획득에 위협요소가 된다는 것을 인지한 노동자들은 일상의 모든 부분을 반복되는 노동을 위한 부수적 행위로 만들게 되었고, 그러한 과정의 결과로 개인적 일상(삶)의 가치는 급격하게 낮아지면서 동시에 일상은 다만 노동을 위한 여건의 조성이라는 단계로 추락하고 말았다.



신성하다고 강조되고 있는 노동(실제로 매우 신성해야 할 노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여야 한다는 가치는 사라지고, 오히려 노동자들은 노동의 과정과 결과에 종속되어버리는 기이한 상황이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창조하게 했다. 하지만 혁명은 의외의 과정과 의외의 결과로 나타났고 혁명으로 해서 노동자들이 그러한 노동의 과정에서 벗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영문판 표지(촬영)


이에 대해 러시아 무정부주의 이론가였던 알렉세이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그의 책 “빵의 쟁취(1892)”에서 이렇게 그 대안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혁명으로부터 더 이상의 것을 기대한다. 빵이 확보된 후에는 여가가 최고 목표이다.– 그렇다! 이 여가는 혁명의 최후 보루다.” 즉, 어찌할 수 없는 반복 노동으로 일상이 종속되어버린 노동자의 삶에서 반복의 고통스러움을 그나마 잊게 하는 것이 여가(크로포트킨이 말하는 여가란 곧 문화적 철학적 공간을 이야기한다.)라고 말한다.



일상에서 문화적 공간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 공간을 통해 좀 더자신의 일상에 대한 진지하고 투철한 철학적인 탐색을 해 보는 것이야말로 어차피 근대적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반복의 일상성을 유지해야 하는 우리가 우리 삶의 주체적 결정자로서 놓칠 수 없는 최후의 보루 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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