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행 고속버스에 배운 시간의 속도
5월이면 우리 가족은 전주에 내려갑니다.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요.
올해는 하필 엄마 기일이 연휴와 겹쳤어요.
지난 명절, 차를 몰고 갔다가 지독한 교통체증을 경험한 우리 가족은 이번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교통체증을 피하려면 기차가 가장 확실하지만
연휴라 티켓 구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전주행 KTX는 겨우 구했지만 서울행은 결국 실패. 대신 프리미엄 고속버스를 예매했습니다.
도로 상황이 불안불안 했지만, 전용차로를 이용하니, 직접 운전하는 것보단 빠를 거라 기대했죠.
전주에서 성묘를 하고 돌아오는 길.
아니나 다를까, 도로 교통 상황을 보여주는 사이트의 고속도로가 온통 붉은 색입니다
전주에서 서울 강남고속터미널까지 예정된 버스 이동 시간은 2시간 30여분.
흠.
과연 제시간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을까.
어른들의 걱정이 시작되었지만
은콩이는 이미 신이 났습니다.
“이모 정말 버스에 TV가 있어?”
“비행기처럼 의자마다 TV가 있는 거 맞아?”
“가면서 과자 먹어도 돼?”
“나 누워서 가도 되는 거야?”
태어나서 처음 타는 고속버스인데다
프리미엄 고속버스라니!
어른인 저도 궁금한데
아이의 호기심은 말할 것도 없겠죠.
버스는 실제로도 정말 좋았습니다.
한 줄에 3좌석, 전체 20석 남짓.
좌석 공간도 넉넉한데다, 무려 리클라이너 의자!
광고에서나 보던 비행기 일등석 느낌이랄까요.
우와-.
은콩이는 자리에 앉아마자 감탄사를 쏟아놓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TV를 조작해보고
커튼을 쳤다 걷었다 하며
의자를 눕혔다 세웠다 하면서
자기 몸으로 길이를 재보기도 합니다.
“이모 이거 봐. 다리가 안 닿아!
나한텐 침대다, 침대. 너무 좋아.”
“기차보다 좋아?”
“응. 천배백배. 누워서 잘 수도 있잖아.”
은콩이도 꽤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당일치기로 다녀오느라
새벽부터 움직였으니 피곤할 밖에요.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아이는 목배게를 하고 뻗어버렸습니다.
저도 잠깐 꿀잠을 잤죠.
그런데 문제는, 눈을 떴을 때였습니다.
전용도로가 무색할 정도로 버스는 걸음마 운행 중이었어요.
출발 후 2시간 30분이나 지났지만
거리상 절반도 가지 못했으니 할말 다 했죠.
그나마 다행인 건
은콩이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단 사실.
서울로 가면 갈수록
도착 예상 시각이 가까워져야 하는데
오히려 점점 멀어지는 기이한 현상이라니.
저녁 8시 30분이었던 도착예정시각이
새벽 1시 40분까지 밀려났어요.
“설마, 에이 거짓말이지?”
고속버스는 이름값이 무색하게
거북이처럼 느렸고
창밖은 정지화면처럼 그대로였습니다.
잠이 잔뜩 묻은 은콩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모, 다 왔어?”
토닥토닥.
“아니, 아직 한참 더 가야 해. 이모가 깨워줄게.
은콩이는 코오- 자.”
휴우-.
아이는 스르륵 다시 잠에 듭니다.
반면, 저는 한숨도 잘 수 없었어요.
도로가 새빨갛게 불타오를수록
걱정과 근심의 불꽃이 시퍼렇게 피어올랐습니다.
도대체 왜 밀리는거야?
도로 정체의 이유를 폭풍검색하다가
‘왜 기사님은 안내도 안 해주지?’
운전석을 뚫어지라 노려보며
엉덩이를 들썩, 입을 달싹거리기도 했죠.
‘새벽에 도착하면 뭘 타고 집에 가지?’
‘6명이 한 차에 탈 순 없는데?’
‘애들이 힘들어할 텐데...’
‘씻고 침대에 들어가려면 새벽 4시는 넘겠는걸...’
꼬리에 꼬리를 문 걱정은 어느새,
내일의 일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버스는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서울에 진입했습니다.
제 눈 밑에
깊은 밤의 어둠보다 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을 무렵, 은콩이가 시원하게 기지재를 펴고 일어납니다.
“이모 몇시야?”
“새벽 1시 넘었어.”
“으응? 새벽 1시?”
“은콩이가 자는 동안 길이 무지 막혔어.”
“얼마나 걸린 거야?”
“한 6시간?”
“에에? 6시간?”
창밖으로 무심히 고개를 돌린
아이의 입에서 심드렁한 탄식이 터져나옵니다.
“고속버스가 고속이 아니네.”
은콩이의 시니컬한 한마디에
나는 터저나오는 웃음을 꾹 눌렀습니다.
“아무래도 이름을 바꿔야 겠다. 그렇지?
느림보 버스라든가, 거북이 버스, 어때?”
제 단순사고 체계는
단 1초 지나지 않아 바스스 무너져 내립니다.
“아니, 나한테는 고속버스였는데.”
“뭐라고?”
“눈 감았다 떴더니 다 왔잖아. 그러니까 고속버스지.”
저에겐 답답했던 6시간이
꿀잠 잔 아이에겐 순간이동이었던 거죠.
버스의 속도도, 도로 사정이 아니라
타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인슈타인도 말했죠.
“즐거운 시간은 빨리가고, 지루한 시간은 느리게 간다.”
은콩이는 태블릿을 켜더니
뭔가를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언뜻 보면 비행기 같았고,
유심히 보니 둥글둥글한 버스가 되어 있었어요.
은콩이는 무지개 색 몸통에 커다란 바퀴를 단, 하늘을 나는 버스를 그려 넣었어요.
“버스가 왜 하늘을 날아?”
“이게 진짜 고속이지.”
무지개 색 몸통에 큼직한 바퀴.
어딘가 조금 둔해 보이지만
속으론 누구보다 날고 싶은 고속버스.
어쩌면 우리도 그림 속 버스가 아닐까요?
세상 앞에선 천천히 굴러가지만
마음 한켠에선 날고 싶은 속도를 품은......
언젠가 고속버스가 날 수 있다면
진짜 고속버스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겠죠?
[참고]
고속버스의 ‘고속’은 빠르다는 의미보다는, 고속도로 중심의 효율적 이동 시스템을 뜻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의 ‘느림보 버스’도, 사전적으론 충분히 고속버스였던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