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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w Aug 29. 2023

두 번째 산티아고, 여섯째 날

Ziortxa-Bolibar-Larrabetzu 34km

2023. 4.19


어느 하루를 짧게 걸으면 그다음 날은 어제 걸었어야 했던 거리를 보충하듯 더 걷게 된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원래는 27km 정도까지 걸으면 나오는 마을에서 멈출 예정이었다. 오후 3시쯤 이곳을 지나는데 이상하게도 순례자들의 모습도, 빨래를 널어놓은 어떤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자기 합리화가 발동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약 6km를 더 걸어 Larrabetzu라는 마을까지 걸어왔다.


숙소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쯤, 언덕길을 오르다가 어미 말과 함께 있는 정말 작은 새끼말을 보았다. 어제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새끼양과 새끼말을  봤었는데 이렇게 작은 말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태어난 지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작은 모습이 신기해서 그 자리에 서서 사진을 찍는데 어제 수도원에서 같은 방을 쓴 순례자가 오시더니 내 옆에 멈춰서 ‘정말 작네’ 하고 나와 같이 감탄하셨다. 그래서 또 짧은 동행을 하게 되었다.

독일인 아주머니는 휴가 차 산티아고에 오셨으며 이전에 프랑스길을 두 차례에 나눠서 다녀오셨다고 하셨다. 프랑스길을 다녀오셨다는 순례자를 종종 만났는데 북쪽길이 프랑스길보다 훨씬 힘들다고 하신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북쪽길이 오르내리락 하는 것이 쉽진 않지만 프랑스길과는 또 다른 묘미가 있다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셨다.


휴가를 내고 오셨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어떤 일을 하시는지 여쭤본다. 아주머니는 사람들에게 식물의 효능을 알려주고 치유하도록 돕는 직업을 갖고 계신다고 했다. 심리학을 공부했다고 하면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 맞춰봐"하는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처럼 오는 길에 봤던 식물이 무엇인지 알아보셨는지 여쭤보니 그러하셨다고 했다. 내가 산을 오르며 ‘아! 저기 당나귀가 있네?. 아! 저기 양 떼다!’. 할 때 이 분은 내게는 안 보이는 식물들의 이름과 그 효능까지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계신 것이다. 그렇게 잠깐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천천히 오겠다고 하여 잠깐의 대화가 끝이 났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의 배경이 되는 마을을 지났다.

그렇게 나는 다음 목적지까지 또 하염없이 걷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Gernika. 게르니카는 피카소가 스페인 전쟁의 폭격으로 황폐화된 게르니카 마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 제목이다. 책에서 본 그 마을을 생각지도 못하게 지나게 되다니. 미술관 안팎으로 견학온 학생들이 붐볐다. 잠시 미술관을 둘러보고 게르니카 시청 앞 광장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각 동물과 인물은 전쟁의 피폐함을 나타낸다.

저녁 7시가 다 되어 도착한 알베르게 역시 작은 마을에 위치하였는데  체크인을 담당하는 호스피탈로가 부재하여 20분 동안 의자에 앉아 있으니 프랑스에서 오신 듯한 할머니 순례자분이 여기저기 문마다 노크를 하시며 호스피탈로를 불러와 주셨다. 다행히 침대 2개가 남아 있었다고 했다.

Larrabetzu 까지 10km 남았음을 알려주는 이정표

그렇게 체크인을 마치고 씻은 후 침대를 정리하는데 내 옆 침대에 익숙한 침낭이 눈에 띄었다. 색깔을 보니, 마르키나에 머물 때 잠깐 나와 일화가 있었던 사람의 배낭과 옷가지인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이 맞았다. 이 사람을 기억하는 이유는 숙소에 불이 소등된 후 난 거의 잠이 들려고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쪽으로 플래시를 비춰 너무 놀랐었기 때문이다. 두 번쯤 내 얼굴에 불을 비추더니 내 맞은편 침대로 침낭을 가져와 잠을 잤던 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누군가 하고 보니, 그날 저녁 나에게 성냥이 있냐고 물어봤던 남자였다. 요즘 라이터가 아닌 성냥을 물어보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로도 숙소에서 혼잣말을 하고 문득문득 큰 소리로 혼자 웃기도 해서 이상하다고 여겼던 사람이었다.

정갈한 건물 2층에 있던 순례자 알베르게

바로 그 사람이 오늘 내 옆에서 잔다는 사실에 난 조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소등 시간을 30분 남기고 숙소로 들어온 이 남자는 내게 창문을 열어놔도 괜찮겠냐고 물어봤다. 난 괜찮다고 대답한 후 잠을 청했는데, 이 남자는 갑자기 전자레인지로 요리를 하기 시작하더니 모두가 잠자려고 하는 시간에 그릇을 달그락거리며 요란한 저녁 식사를 하고 소등 시간을 훨씬 넘기고 나서야 소란스러움이 사그라들었다. 보호가 필요해 보이기도 하는데, 혼자 산티아고를 걸어도 되는 상태인 것인지. 그런데 한편으로는 나에게 말을 걸 때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것 같은데 영어로 곧잘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고 자문자답을 하며, 크게 혼자 웃는 모습이 일반인과 구별되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어떻게 산티아고 길을 걷게 되었을까, 괜스레 쓸데없는 생각까지 뻗쳐나간다.


이 길을 걷고 있는 다른 순례자들과도 그렇듯이 이 사람과 앞으로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까지 가는 순례길에 어제오늘처럼 오고 가며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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