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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에 열린 문

나를 만나러 가는 시간.

by 이대영

햇빛이 옮겨가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 안을 따뜻하게 채우던 빛이 천천히 물러나면서 방 안이 어둡게 변했다. 빛이 물러난 벽은 원래 색을 잃어버리고 검게 어두워졌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글 쓰던 펜을 놓고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가만히 쳐다보았다. 시간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머리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엇그제까지는 그래도 중년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품위 있어했는데, 그녀는 지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꼭 그럴 때면 마음이 더욱 여려지는 것 같아 보인다. 그녀는 벽에 걸린 엄마 사진을 바라보다가 눈물이 고이기도 한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엄마..."하고 부른다. 어릴 적 식은 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서로 먹으라고 했다고 한다. 엄마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고, 나도 "엄마, 나도 배 안 고파"라고 했다고 한다. 그 아이가 참 많이도 컸다.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은 것 같은 그녀. 이럴 땐 누가 "슬프지?" 하고 묻기라도 하면 금방 울 것처럼 보인다. 요즘 영화를 봐도 혼자 눈시울을 적시는 일이 많다. 그런 영화는 보지 말아야지 말하면서도, 다음에 보면 또 그런 영화를 보고 있다. 가슴에 눈물 한 바가지를 안은 채로 말이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꼭 이 시간이다. 시간은 마치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그녀에게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럴 때면 모든 게 멈춘다. 살아있는 것은 생각뿐이다. 이따금 휴대폰 액정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할 뿐, 방 안에는 그녀 말고는 살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스며든 바람에 커튼이 한번 살랑거리고는 멈췄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보인다. 손에 잡히는 게 없어 보인다.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본다. 가로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자동차가 크략션을 울리며 지나가고,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그녀의 의식은 그저 저들의 행동을 따라갈 뿐이었다. 마치 빈 허깨비처럼, 따가운 햇빛 아래 두 팔을 벌리고 논밭에 서 있는 허수아비가 된 것처럼.

맛있게 마시려고 내려놓은 커피는 어느새 식어 있었다. 검은 물이 가득 담긴 컵 가장자리엔, 조금 전까지 물안개처럼 흩날리던 가느다란 김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다시 데우지 않았다. 그냥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이 시간을 '평온하다'라고 말한다. 할 일을 마치고 조용히 주어지는 휴식 시간, 음악을 들으며 여유를 가질 시간, 보고 싶은 책을 보는 시간,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는 묘한 허전함만 가득하다. 그러나 그 허전함을 일부러 채우고 싶지 않아 보인다. 그녀는 어쩌면 그런 익숙함에 언제부터인가 오래 길들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없는 집에 아이는 혼자 있었다. 아이는 바구니에 담긴 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아무 감정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는 나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할 것처럼 고구마를 한가득 입에 문 채로 입을 움씰거렸다.


"왜?"


손에 있던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거실, 텅 빈 식탁, 조용한 공기, 어쩌면 아이가 살았던 그 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이렇게 혼자 있는 게 익숙한 것도 그런 기억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감정도 어쩌면 그녀가 느꼈던 감정과 닮은 것은 아닐까?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것. 지금 외로움 보다 더 깊었던 외로움, 지금 조용함보다 더 조용했던 아이의 집. 슬프다고 말할 때 그녀보다 더 슬펐을 아이의 마음. 그 아이가 조용히 그녀 곁에 앉아 숨소리 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그녀에게 말하려고 했던 것은 더 이상 외로워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그녀가 지금 느끼는 외로움이, 그 아이가 느꼈던 외로움보다 크지 않으면 지낼 수 있다는 뜻이다. 억지로 달래려고 하지 말고, 주어지는 느낌 그대로 살라는 뜻이다. 아이는 억지로 외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너무 외로워하지 말기. 너무 힘들어하지 않기. 너무 쓸쓸해하지 않기. 바보같이 너무 울지 않기. 억지로 외면하지 말기. 별일 아닌 것으로 상처받지 말기. 그런 생각이 들면 들지 않도록 연습하기.


조용하고 쓸쓸하다는 것은 그저 '감정'일 뿐이다. 감정 때문에 힘들어할 필요 없다.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억지로 채워 넣으면 감정은 더 부풀어 오른다. 혼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감정이다. 혼자 있는 게 그냥 익숙할 뿐이다. 그건 외로움도 아니고, 슬퍼할 일도 아니다.


정원 위로 바람이 불자 꽃들이 일렁거렸다.

시계가 세 시를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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