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속의 초대
그림자 속의 초대
단청은 검은 두루마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붉은 글씨로 적힌 ‘천지봉황제(天地鳳凰祭)’라는 단어가 마치 피처럼 번져 보였다.
천지봉황제. 그것은 무림의 질서를 뒤바꿀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그의 손끝이 두루마리를 스치자, 순간 거친 기운이 퍼져 나왔다. 두루마리가 감추고 있던 내공이었다. 단청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조심스레 펼쳤다.
‘봉황이 날개를 펴면,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린다.’
문장의 첫 줄을 읽는 순간, 단청의 머릿속에 깊이 묻어 두었던 기억이 스쳤다.
십 년 전. 무림맹에서 전해 듣던 고서(古書) 속의 한 구절.
그 예언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경연이 아니었다.
‘이건 시험이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흑색 도포의 사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단청은 다시 한번 두루마리를 내려다보았다. ‘운명의 시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그의 심장은 묵직하게 뛰었다.
천지봉황제가 열리는 장소는 강호의 중심, ‘운강(雲崗)의 협곡’이었다. 그곳은 예로부터 무림의 성지라 불리며, 수많은 영웅들이 거쳐 간 곳이다.
단청은 천천히 길을 나섰다.
그가 길을 나선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밤이 깊어가던 어느 순간, 단청은 인기척을 느꼈다.
그는 즉시 검을 움켜쥐고 몸을 낮췄다.
그림자가 숲 사이로 움직였다.
“어디까지 가는 길이지?”
낯익은 목소리였다.
단청은 검을 조금 내리고 말했다. “나를 막으러 온 것이냐?”
그림자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
흑랑(黑狼) 유진이었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난 네가 이곳을 지날 거라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단청은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십 년 전, 같은 사부 밑에서 수련했던 벗.
그러나 이제는 길을 달리하는 자.
단청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무슨 목적으로 나를 기다린 것이냐?”
유진은 천천히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네가 봉황제에 초대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청은 침묵했다.
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봉황제는 단순한 대회가 아니다. 이번 대회에는 무림의 모든 강자들이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단순히 승부를 겨루러 오는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단청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너도 그 ‘숨겨진 목적’을 알고 있나?”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봉황제의 목적은 단순히 승자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림의 주인을 정하는 것이다.”
단청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새로운 무림의 주인.
그것은 곧….
“무림의 질서가 뒤바뀐다는 뜻인가?”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무림을 지탱해 온 힘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 봉황제가 끝나면,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단청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래서 넌 나를 막으러 온 것이 아니라….”
유진이 미소를 지었다. “너와 함께 가려고 온 것이다.”
단청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답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유진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검을 뽑아 들고 낮게 경고했다. “나와라.”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곳에 서 있는 이는 붉은 망토를 두른 남자였다.
단청의 눈이 번뜩였다.
“화염의 사자(火焰使者) 백랑(白狼).”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백랑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단청. 그리고… 유진.”
유진이 검을 겨눈 채 낮게 물었다. “너까지 온 걸 보면, 이 일이 단순한 대회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겠군.”
백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봉황제에는 단순한 무림 고수들만 모이는 것이 아니다. 숨겨져 있던 고대의 혈통, 잊혀진 봉황의 사도(使徒), 그리고… 너의 과거를 아는 자들까지 모일 것이다.”
단청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가 지나온 길. 그가 버려야 했던 것들. 그것들이 모두 이번 봉황제에서 다시금 마주하게 될 운명이었다.
백랑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번 대회가 끝나면,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네가 그 시대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청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유진이 옆에서 덧붙였다. “너는 혼자서는 부족하다. 우리 셋이 힘을 합친다면, 봉황제의 숨겨진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몰라.”
단청은 천천히 검을 쥐었다.
그의 운명이 이끄는 길.
그 길의 끝에서, 그는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천천히, 그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다. 함께 가자.”
그렇게, 그들은 운명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