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겠거니

by 박태신

5개월 전 12월 중순 산책 때 이야기다.



얼어붙은 호수 위를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발자국이 새겨지지 않는, 역시 얼어붙은 수풀가를 따라. 먹잇감을 찾고 있겠거니.


제각각 한 뭉치씩 머리털을 이고 있는 억새들이 허수아비 무리처럼 늘어서 있다. 호수를 지키고 있겠거니.


한겨울 추위를 누그러뜨리는 햇살이 직선 빔으로 나를 쏘아댄다. 부러 쏘이고 싶어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핸드폰이 긴 문장을 쓰는 노트가 될 줄 몰랐다. 쥐똥나무인 듯 검은 열매 수백 개 달린 나무 덤불이 앞에 있다. 검은 열매 하나, 핸드폰 화면 검은색 글자 하나.


헐벗은 나뭇가지들은 작은 새를 숨겨주지 못한다. 가뜩이나 겁이 많은데 작은 새와 사람의 거리는 더 멀어진다. 덩치 큰 까치는 겁이 없어 내 머리 위에서 발로 삿대질하고 있다. 나와 조금 떨어진 땅바닥에서 자연 먹이들을 삼삼오오 쪼아대는 참새는 얼마나 귀여운지.


호수 주변의 바닥 등이 한낮에 오작동돼 켜져들 있다. 나는 그걸 전기 낭비라고 고루하게 생각했다. 켜져 있을 이유가 있겠거니 해야 하는데. 저만치 학생 커플이 벤치에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자아이가 허리를 돌려 남자아이를 향하고 있다. 긴한 이야기가 있겠거니.


카페에 들를까 했는데 그냥 벤치에 눌러앉았다. 캔 커피 사 올 걸.


한 트랙 돌고 온 마을버스 지나가는 풍경이 시골스럽다. 사람 소리 새소리뿐 소음이라곤 들리지 않으니 여기가 시골이라 치지 뭐. 도시 속 시골에 얼어붙은 호숫가를 나도 고양이처럼 어슬렁거린다. 나도 살아있는 게 맞나? 굳어 있던 마음이 풀린다. 저쪽 커플, 어느새 포옹하고 있네……



5개월 후다. 호수 한가운데 분수가 근무를 끝낸 시간, 다시 그 자리에 섰는데 검은 열매를 내놓던 나무 덤불이 하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순간 호수 주변에 장식 등이 켜졌다. 꽃과 등이 어두운 세상을 밝혔다. 여기 온 이유가 있었구나.

keyword
이전 13화새에 대한 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