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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사이드B May 25. 2023

인간들 모두 까기, 첫사랑도 이런 모습일 수 있다.

내 인생의 인간들 모두 까기 열두 번째

우리들은 암묵적으로 첫사랑에 대한 이런 정의를 가지고 있다.

첫 연애든 아니든 처음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그때, 그 사람.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22살이었다. 당시 난 경기도 외곽에 있는 부모님 댁에 살고 있었고 

휴학 후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그냥 그 흔한 뚜레쥬르 오픈 아르바이트.

알바를 시작한 첫날 

같이 일하는 알바생들과 금방 친해져 편하게 일하다 끝나갈 무렵

휴가였던 그가 가게에 들어왔다.


그는 그곳에서 빵을 만드는 직원이었다. 

너무 편하게 친해진 다른 직원들과 달리 십이(가명)는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그가 나를 보는 표정, 희미하게 짓는 미소가 나를 경계하는 듯했고

이 사람과는 친해지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소 기분 좋지 않은 첫 만남 후, 그가 휴가에서 돌아와 같이 근무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일적인 대화 외에 전혀 말을 나누지 않았고,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각자 맡은 일을 해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그는 내게 조금씩 말을 걸어왔다.

나는 묘한 불편감을 주는 이 사람이 궁금했기 때문에

기꺼이 그와 친해졌다. 


그때 난 살면서 처음 느끼는 기분을 느꼈었다. 

이 사람과는 친해질 수 없겠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린 너무나 잘 맞는 사람이었다. 

대화가 너무 재밌었고, 제일 친한 친구한테도 할 수 없는 비밀의 어떤 것도 너무 쉽게 나눌 수 있었다.

일하는 내내 그 사람과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고 

오히려 알바시간이 끝나도 자진해서 남아서 그의 곁에 있었다.

그러다 같이 퇴근해 저녁을 먹으며 끝나지 않는 대화를 했다.


재밌었고 신기했고 나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존재한다는 게 슬프게도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식을 했다.

그날따라 기분이 좋다던 그는 초반부터 술을 빠르게 마시기 시작했고

어느새 취해 헤롱헤롱대며 바람을 씌러 나갔다.

나가보라는 주위 사람들의 말에 그의 곁으로 갔더니 그가 쭈그려 앉아 올려다봤다.

헤- 하고 웃으며.

난 또 왜 그런 그의 웃음을 보고 같은 표정이 되는가.


그러면서 그는 그 상태로 나에게 고백을 했다.

좋아한다고.

그 말이 너무 반가웠다. 그때 알았다. 나 이 사람 좋아하고 있구나.

하지만 술 취해 감정적인 말을 하는 것을 믿지 않는 나는 애써 장난으로 넘겼다.


그러더니 그는 더 적극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손잡아도 되냐고.

손이야 얼마든지 잡을 수 있지 않은가.

잡아줬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손을 잡더니 안아도 되냐 물었다.

포옹 정도야 친구끼리도 응원으로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안아줬다.

뽀뽀해도 되냐고 물었고,  그제야 난 고민했다.

친구끼리도 뽀뽀를 하나?

진짜 지금도 확신해서 말할 수 있지만 십이라서 했다.

절대 내가 쉬워서가 아니다.

그러더니 키스해도 되냐고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당장 이 사람의 마음을 받으라고 속 안에선 난리가 났지만

술 취한 사람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단 하나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꾹 참았고

내일도 같은 마음이라면 다시 고백하라고 겨우 진정해 말했다.


2차 회식까지 한 후 다른 직원들은 먼저 떠나갔고

나는 다시 그와 둘만 남았다.

그가 타고 갈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다시 한번 키스해도 되냐는 질문에 결국 난 응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그 눈빛과 목소리는 너무나도 섹시해서 나 아닌 누구라도 막지 못했을 거라 자부한다.


그러고 나서 다음 날, 그는 전날 밤 그 자리에서 다시 고백을 했고 우린 사귀게 됐다.

그로부터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라는 결론이면 이렇게 글을 쓸 생각도 안 했겠지.

이제부터 나오는 글은 아마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읽은 것도 대단하니 이만 나가셔도 된다.


그는 나보다 8살이 많았고, 같은 동성이었으며, 시골에 계신 부모님의 성화에 선을 봐야 했다.

난 선을 봐야 한다는 그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잘 보고 오라고 했다.

어차피 우리 둘의 연애가 평생 갈 것이라 생각 자체를 안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을 막을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거에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나와 선 본 사람 두 명을 동시에 만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만난다는 말이 무색하게 한 쪽으로 기울어진 비이상적 삼각형이긴 했지만.


당시에 나와 그는 거침이 없었고 이기적이었다.

누군가를 이토록 원한다는 감정이 처음이라 앞만 보고 달려나가는 나와

그런 나를 자제시킬 수 없었던 너무나도 철이 없던 그는 

첫사랑의 아련함, 풋풋함, 설렘과는 다른 모습의 사랑을 했었다.


술 먹고 그의 집으로 찾아가 기다리다 그의 어머니가 집에 데려다준 적도 있고,

선 본 사람 앞에서 사랑한다는 말도 외치며 막장 스토리를 만들어나갔다.

더 추악한 모습이 많지만 타인이 보는 곳에서 더 말하기엔 아직 모든 걸 내려놓지 못했다. 


어차피 끝이 보이는 사랑이었기에

다른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기적이게 나만 생각했고, 내 감정이 먼저였으며,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

금지된 걸 더 원하는 나의 변태성을 그때 확실히 체감했다.


그렇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했던 사랑을 마무리해야 될 때가 온 걸 느꼈을 때

정말 무척이나 힘들었다.

이별을 감당할 수 있을까 너무 무서웠었다.

하지만 미련 없이 사랑해서인지 생각보다 너무 쉽게 그 사람을 잊을 수 있었다.

물론 헤어진 후에도 깔끔하게 끊어내지 못해 몇 번을 다시 연락했던 그와 나지만,

생각보다 우린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었나 보다.


처음을 이렇게 스펙터클한 연애를 한 탓에

나는 그 이후로 어떤 연애를 하든 무덤덤했다. 

물론 이 사람 전과 후의 연애는 이성이었다.

사실 웃기게도 그 당시에 난 내가 동성을 만난다는 것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눈 가리게 했던 것이다.

오히려 헤어지고 나서 한참 후에 친구들한테 얘기할 때 실감했다.

내가 동성을 만났었구나...


가끔씩 나는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을 떠올린다.

"네가 내 나이가 빨리 됐으면 좋겠다. 그럼 내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난 그의 나이가 빨리 되길 원했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가 될 무렵쯤, 그 사람의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었다.

이해가 됐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달려드는 나를 달래면서 사랑했을 그가 떠오른다. 


그 당시 그의 나이보다 많은 나이가 된 지금,

내 어린 날의 바보 같았던 첫사랑을 평가하자면.

대책 없고, 무책임했으며, 뜨거웠고, 짜릿했다.

후회도 없지만 미련도 없다. 


나는 앞으로 누군가를 이 사람을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바라면 안 될 것 같지만 바라본다.


이전 15화 내 인생의 인간들 모두 까기, 들이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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