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보식 Nov 11. 2020

< 길 위의 명상 >

14. 스트레스_한라산숲 머체왓소롱콧길



  2004년부터 2012년까지 무려 8부작 시리즈물을 만들어내며 9년간 종전에 없던 히트를 쳤던 미국 드라마 <하우스 MD> 시리즈가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바로 진단의학 전문의인 ‘닥터 하우스’인데, 이 주인공의 캐릭터가 독특하다. 대학병원 의사이나, 환자와 사람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니 아예 환자를 포함한 사람과의 접촉 자체를 꺼린다. 이유는 세상과의 거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오로지 환자를 치료하고 살리는 일에만 몰두하기 위해서이고, 동시에 복잡한 인생사로 얽힌 사람들과의 만남은 자신의 목적과 상황에 맞게 숱한 거짓말을 다반사로 일삼으며 오히려 환자의 치료와 사람과의 관계에 방해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닥터 하우스는 진료를 위해 환자의 말보다는 환자의 현재 증세와 과거 병력 그리고 생활환경에만 집중해서 마침내 병의 원인을 파악하고 생명을 구해낸다. 사람의 경우에도 겉으로 보이는 태도로만 집중하여 분석해 가는 방법을 택하며 그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이 많다. 그런 그를 병원과 환자와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신뢰하고 의지하고 또 따른다. 나는 유달리 그런 닥터 하우스의 캐릭터에 매료되었는데, 환자의 치료와 목숨을 구하겠다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곳에도 시선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강한 집중력과 목표의식, 그리고 그런 자세에서 비롯된 흔들리지 객관적인 관점을 지키려는 탁월한 의지 때문이었다.


  현대인이 앓고 있는 암을 비롯한 대부분의 질병이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은 수많은 연구자료가 이미 밝히고 있는 바와 같다. 보통의 사람에게 스트레스란 어떤 외부 환경과 사람간의 관계로 주어지는 강압적인 요인이 내가 버티고 수용할 수 있는 단계를 넘을 때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똑같은 상황이라도 누구에게는 스트레스가 되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그저 그런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각자의 수용 한계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름의 혹독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지내왔던 20~30대를 지금의 관점에서 돌이켜보면 스스로 측은하게 여겨지면서도 왜 그랬는지 어리석음과 생각 짧음에 부끄럽기조차 하다. 상황은 똑같고 나 자신도 똑같은데 그때와 지금 사이에 그럼 뭐가 달라진 걸까.

  대한민국에선 대학진학도, 결혼도, 사회생활도 인간이 행복하게 잘 사는 방법이 정해져 있는 것 마냥 한 방향으로 몰아붙인다. 그 ‘한 방향’이란 말의 의미는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으면 결혼을 잘할 수 있고 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데 그게 바로 행복한 삶이고 성공한 삶이라는 단답형 삶의 공식을 말한다. 다소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어떻게 어울려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하고 용서하는지, 어떻게 자신의 일로 스스로와 세상에 이롭게 할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어른도 아이도 관심을 잃은 지 오래다. 어쩌면 관심을 잃은 게 아니라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그냥 포기한 채로 살아간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 오로지 단답형 삶의 공식만이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지니의 마법 램프처럼 여겨졌고, 앞서 말한 질문들에 대해선 눈치껏 잘하는 게 능사인 채로 방치되었다. 하지만 부와 성공이 행복한 삶이라는 한 가지 공식대로 살고자 해도 그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 일들이 인생의 어느 순간 곳곳에서 지뢰밭처럼 튀어나오기 십상이고 그럴 때마다 그동안 눈치껏 잘해오던 미봉책으로는 감당해낼 수 없는 지점에 서게 된다. 지뢰밭의 파괴력에 그간 견뎌왔던 삶이 통째로 무참하게 무너지고 마는 한계점들 말이다. 도식적인 삶의 공식이 지배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순진하고 착한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는 교육을 받고 성장한 사람은,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암기처럼 외워지기를 강요받았던 공식처럼 삶이 살아지지 않으며, 아울러 공식처럼 사는 삶이 결코 행복하지도 성공한 삶으로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을 지독한 고통을 통해 어렵게 깨닫게 된다. 물론 가끔씩 공식대로 살아서 행복하고 성공했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때마다 힘들겠지만 그런 소수의 몇몇 사람들처럼 우리 모두 더욱 열심히 더욱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일하자는 분위기로 다시 몰아간다. 하지만, 그 공식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터무니없이 제한적이다. 그리고 그 공식에 적합하지 않아서 그 공식대로 살지 못한 사람들은 너무나도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된다는 부작용이 만연하게 된다.

  몇 년 전 어떤 영화를 보는 내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별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한참 동안 영화의 잔상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그런데 영화로 인해 느꼈던 혼란스러움의 느낌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나의 삶 어디에선가 이미 그것도 여러 번 마주 대한 기억들을 그 혼란스러운 느낌이 일깨워 주었다. 지금까지 배워온 교육과 살아온 경험으로는 전혀 어떻게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지 모르는 일들이 점점 갈수록 빈번하게 그리고 강도 높게 만나는 날들이 많았다. 영화의 잔상이 영화에서만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에서 거의 매일 반복되다 싶게 재생되고 또 재생되어 나타났다. 분명히 세상이 가르쳐주고 요구하는 공식대로, 그리고 그 공식에 부합하는 나의 본능이 꿈틀대는 대로 살려고 발버둥 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불편해졌고, 점점 화를 내기 시작했고, 점점 몸이 아파왔으며, 또 점점 불행해져 갔다. 공식대로 했는데 공식이 알려준 정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건강하지도 행복하지도 그리고 성공하지도 않은 삶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혼돈의 시간만큼 나는 지옥 같은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살기 위해 어떻게든, 세상의 공식으로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무수히 반복해서 알았으므로 공식이 일러주는 것이 아닌 나만의 새로운 공식을, 나만의 길을 찾아야 했다. 데워지고 있던 솥 안에서 조금씩 죽어가도록 방치되었던 개구리가 순간 극도의 뜨거움을 맛보고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솥 밖으로 튀어나오게 되었다고 하면 적절한 비유일까. 지금 만약, 참을 수 없을 만큼 극심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이나, 불면증이나, 번아웃이나, 공황발작이나, 거식증/폭식증이나, 온갖 중독이나, 폭력/살인/자살의 충동이나, 그리고 각종 암과 온갖 이름의 질병들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면, 그 모든 아픔들은 단답식 삶의 공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우리가 삶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음을, 그래서 뜨거운 솥 안의 개구리처럼 빨리 솥 밖으로 튀어나와 즉시 다른 길로 살아가야 함을 알려주는, 저마다의 안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내안의 목소리’들이 긴급으로 타전하는 경고신호일지 모른다. 나만의 길을 걷지 않아서 만들어진 스트레스라는 이름의 온갖 경고음을 알아채고, 그 스트레스들이 그동안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건강과 행복을 망치며 만들어낸 모든 증세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닥터 하우스가 환자를 살리기 위해, 오히려 환자와는 일정한 간격을 둔 채, 완전한 집중력으로 환자가 전하고 있는 다양한 고통의 표지판들과 고통이 만들어지게 된 원인과 관계들에만 파고들며 분석해서 마침내 환자를 살려내는 것에만 집중했던 것처럼, 나를 뒤흔드는 모든 혼란스러운 기억과 생각과 감정들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나와 내가 아픈 환자였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아픔은 그간 억지로 끼워 맞추려 했던 세상이 요구한 삶의 방식과 방향이 원인이었음을 알아채야 했다. 모든 시선을 나에게만 집중하게 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응시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나에게 자연은 병원의 응급실이었고, 자연에서의 걷기는 길을 잃고 죽을 듯 고통스러워하던 나를 살리기 위한 닥터 하우스의 응급처방이었으며, 그리고 자연은 나를 다시 길을 잃기 전 그곳으로 데려다 줄 힘과 용기를 가져다준 휴식처였다. 자연은 스트레스에 휘말리지 않고 스트레스를 바라보게 하는 방법을 일러주었고, 또 스트레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트레스를 해석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며, 동시에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치유와 회복의 에너지를 채워주었다. 제주의 바다로 산으로 곶자왈로 오름으로 언제 어디든지 자연의 품속으로 찾아 들어갈 때마다 한결같이 그렇게 해주었다. 

     

***   

  

열세 번째 길한라산숲 (머체왓소롱콧길     

  

  집이 있는 모슬포에서 멀지만 가면 갈수록 더욱 좋아지는 숲길이 한 곳 있다. 머체왓소롱콧길이 그곳이다. 처음엔 남원의 중산간 산록도로를 지나다 우연히 입구 푯말을 보고 이런 곳이 있었구나 하며 별 기대 없이 가보게 되었는데 뜻밖이었다. 한라산둘레길의 어느 코스에도 속하지 않고 그렇다고 제주도가 직접 관리하는 여느 자연휴양림의 일부도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우선 머체왓에는 머체왓숲길과 머체왓소롱콧길 코스 두 가지가 있는데, 두 가지 코스 중에 한 곳만 선택한다면, 머체왓코스가 마치 꼬불꼬불 작은 용이 꿈틀대며 지나간 자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을 따다 붙인 머체왓소롱콧길을 추천한다. 전체 길이는 6.3km로 머체왓숲길 방문객지원센터에서 출발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데 2~3시간 동안 더없이 행복한 숲길 산책을 제공하는 코스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고 했던가. 머체왓소롱콧길은 처음에 기대가 없었기에 실망할 일도 없었지만, 막상 그 길을 걷고 나서는 실망은커녕 숨어있던 보석 같은 숲길을 처음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그 매력에 빠진 이유는 이 숲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습 때문이다. 처음 길을 들어서자마자 한라산의 동남 사면을 마주 대하고 뻥 뚫린 초원지대를 만나게 되는데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머체왓소롱콧길이 불과 6.3km 길이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걷기 소요시간으로 여유있게 2~3시간을 책정해 둔 것도 이 길에서의 풍광들이 걷는 여행객의 발걸음을 곳곳에서 오래 붙잡아 매어 둘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출발하자마자 초원을 바라보고 평상 위에 앉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무엇 때문에 숲길을 찾는지는 찾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이곳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세상의 모든 희노애락을 넓은 초원 위를 지나는 제주의 바람에 실려 모두 씻어내고 신성한 숲길로 들어가라는 자연의 메시지가 들리는듯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본격적인 숲길로 들어서면 중간 반환점까지 삼나무숲과 편백나무숲이 중잣성을 끼고 교차하면서 길을 이어주는데 그때마다 걷는 이의 두 팔을 크게 벌려 심호흡하게 한다. 한발 한발 내가 걷고 있다는 사실 이외의 어떤 것도 함께 머물며 걸음의 절대성을 방해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인간이 인간의 동네에서 벗어 나와 끝없이 다시 자연으로 찾아들어가 치유를 얻고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자연 속에 머무는 순간에 비례하여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세상에서 만나고 부딪히며 만들어진 세포들위에 새겨진 삶의 힘겨운 자국들이 더 많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오래 그리고 천천히 그곳에 머무는 동안 오래전 어머니 뱃속에서 갓 태어날 때의 아무런 흔적도 없이 순수하고 투명했던 순간의 그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는 생명의 놀라운 힘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초기화하고 다시 리부팅하는 비밀의 공간이 자연이다. 

  그런 순간의 걸음들이 계속 이어지면 어느덧 숲길의 절반 지점에 도착하는데, 이 숲이 품고 있는 놀라운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제주의 그 어느 곳에도 이렇게 많은 방사탑들이 모여 있는 곳을 본 적이 없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열개가 넘는 방사탑들이 집중되어 있는 곳, 어쩌면 삼한시대의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소도(蘇塗)’처럼 이곳도 아마 제주의 숨은 신성한 장소였을 것이다. 숲 입구의 광활한 초원에서 머물며 들었던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 아는 사람들만 찾는 곳이겠다고 싶을 만큼 방사탑들 주위에 마련된 평상에 다시 배낭을 내려놓고 한참을 있어도 지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그 조용하고 신성한 공간이 있어 이 숲을 걷는 사람은 모두 세상에서의 흔적들을 지우고 다시 새로운 날을 맞이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흐트러진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두 손을 잠시 모아 이 숲을 품고 있는 대자연을 관장하는 보이지 않는 어느 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모아 전하게 된다.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라도 몸과 마음과 영혼을 정화해 주는 신성한 곳의 힘을 느끼기에 감사의 기도는 아무런 의도와 기대와 목적 없이 소도의 신전에 바치는 나만의 작은 의식이 된다.            

  반환점을 돌아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내려 가는 길은 서중천을 끼고 전혀 다른 수종의 한라산수목들을 만난다. 비가 내린 뒤여서 그런지 서중천 몇 곳에 연못처럼 물이 고인 곳들이 있었고, 급할 것 없는 도보여행자는 길에서 잠시 벗어나 서중천으로 내려간 다음 계곡의 평화로움에 몸을 의지한 채 또 한참을 머무는 게으름을 부린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면서, 한라산을 마주하는 너른 초원과, 삼나무와 편백나무의 향 가득한 중잣성길과, 신성한 공간 방사탑 군락지를 거쳐, 마치 에덴동산 마냥 맑은 연못을 품고 있는 서중천 계곡길로 이어지는, 제주 숲길의 향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으로 머체왓소롱콧길을 반갑게 기억의 저장소에 담아둔다.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나의 변화무쌍한 변덕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나를 반겨준다. 가끔 자연이 나에게 미소를 띤다는 그리고 때론 나에게 화가 나있다는 느낌이 따사로운 햇볕 속에서 그리고 거친 태풍의 비바람 속에서 감지되곤 했지만 그건 자연이 만들어낸 의도와 반응이 전혀 아니었으며 그저 나의 주관적인 예감에 불과했다. 자연은 거기에 언제나 있을 뿐이었다. 그런 자연의 진면목을 처음 접했을 땐 전혀 알아챌 수 없었고, 수없이 걷는 한결같이 반복되는 걸음의 시간이 쌓이고 또 쌓인 다음에야, 그래서 오직 걷는다는 것 이외의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생각도, 그래서 나를 괴롭혀온 온갖 스트레스로 인한 고통조차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될 쯤에서야, 고요한 무음의 공간에서 자연이 나지막이 전하는 파장으로 전해주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 자연에서 전해오는 파장이 내안의 목소리가 전하는 리듬과 닮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욱 자주 그리고 즐겁게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그 길들을 걸을 때마다 내안의 목소리가 인도하는 방향으로 잘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자연의 길 위에서 나는 행복했고 건강해졌으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 찾아가는길    

 

이곳은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는 곳에 있으므로 개인차량을 이용해야 한다. ‘머체왓숲길 방문객지원센터’를 차량 내비게이션에 찍고 가보자. 숲 길 안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으므로 센터에 있는 화장실을 미리 이용하고 출발하자. 오래 기억될 이곳을 걷고 다시 센터로 돌아오면 센터 옆 작은 공간에 행복한 산책자를 위한 족욕 공간이 있으니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수고한 두 다리를 위한 휴식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겠다.          







#강보식, #섬도보여행가,  #더힐링아일랜드, #길위의명상, #제주를걷는21가지방법, #제주여행학교, #제주인생학교, #제주여행, #인생2, #세컨드라이프, #제주걷기여행, #제주올레, #한라산숲길, #곶자왈, #오름, #명상, #한라산, #머체왓소롱콧길, #스트레스, #치유



이전 14화 < 길 위의 명상 >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