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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우 Oct 18. 2022

서른이 되다.

2장. 1화.

2018년 11월, 가히 기록을 경신했다던 무더위가 식고 겨울이 찾아왔다. 평년보다 약 1도 정도 높은 기온으로 그 시작은 비교적 훈훈했으나 녀석이 본색을 드러내자 한국은 얼어붙었다.


2019년 4월, 한동안 눌러앉은 겨울의 서늘함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초봄, 나는 호주로 떠났다. 남반구 호주는 한국과 날씨가 정반대였기에 나는 다시 한번 겨울을 겪었다.


2019년 11월, 그 찬란하다는 호주의 여름을 조우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다시 밟은 모국에는 2018년도의 그것과는 또 다른 겨울이 찾아왔다.


때문에 나는 1년이 넘도록 겨울을 지내고 있었다.


이건 뭐, 몽골 사람도 아니고…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 유심칩을 갈아 끼웠다. 호주에서 사용하던 유심칩은 반으로 쪼개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공항 어딘가의 쓰레기통에 휙 던져 버렸다. 독점이다. 담합이다. 말이 많더라도 오늘만큼은 핸드폰 액정 상단에 뜬 한국 통신사 로고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는 것이 비로소 실감이 됐다. 곧 와이파이가 잡혔고 온라인으로 고속버스 티켓을 예매했다.


모국 땅을 밟은 감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경유까지 포함해 약 24시간의 여행 때문에 이미 체력은 바닥, 도로록 거리며 뒤따르는 캐리어를 공항 한복판에 유기하고 싶었지만 손에 쥔 그것과 계좌에 남은 돈 몇 푼이 내 전재산임을 알고 맘을 다스렸다.


그날, 멀어져 가던 재환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움직일 수 있었다. 그 길로 멜버른 중심부,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저렴한 비행기 표를 고르다 보니 출국까지 며칠간의 여유가 있었고 그 틈에 일하던 일식집에서 초밥 여사님과 식사를 했다. 일식집 주방에서 일할 때 손님상으로 올라갈 요리를 보며 입맛만 다셨더랬다. 그러나 막상 먹어보니, 지나치게 현지화된 탓에 내 입맛엔 너무 달았다.


“야, 걔는 자존심도 없는 새끼야. 까마득한 동생 돈 훔쳐서, 지 애새끼 기저귀 사고, 아내 생활비 주고… 상우야, 잊어, 잊어. 그런 새끼는 욕할 가치도 없어.”


초밥 여사님이 재환을 두고 말씀하셨다. 여자는 나이가 들면 테스토스테론 분비량이 늘어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초밥 여사님을 보고 있자니 납득이 됐다. 식사를 끝내고 일식집을 나서며 사장님과 직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날, 내게 친절했던 알리는 출근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출국 날을 기다리며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은 며칠 동안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나가서 끼니를 해결하고 돌아와 잠들고 핸드폰 조금 들여다보다 또 잠들고. 신기하게도 그렇게 처자도 잠이 계속 왔더랬다. 호주에서 소모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함이었는지, 앞으로 살아갈 한국에서의 삶을 위해 비축하기 위함이었는지...




고속버스를 타고 천안 터미널에 도착하니 부모님이 마중 나와 계셨다. 아들만 둘인 집이 응당 그렇듯 눈물의 재회 따위는 없었다. 되려 부모님은 이발비가 아까워 마구잡이로 기른 내 머리칼을 보시곤 잔소리를 하셨다. 오랜만에 듣는 그것이 썩 나쁘지 않았다.


부모님 차를 타고 내 고향 ‘병천’으로 향했다. 지난 8개월간의 한을 풀듯, 그리고 그리던 한식을 쑤셔 넣다시피 했다. 여기저기 인사를 다니고 어울리며 시간은 흘렀고 2018년 12월 말일, 망년회 겸 고향 친구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서비스로 나온 생굴을 탐닉하다 인생 처음으로 노로바이러스 투병을 하게 됐다.


그날 늦은 밤. 발가벗은 채로 변기에 몸을 기대어 위로는 토사물을, 아래로는 똥 줄기를 무려 동시에 뿜어 대며 나는 삼십 대를 맞이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했다. 삼십 대의 시작이 남달랐다. 그렇게 나는 서른이 되었다.


태평함과 한가로움도 잠시, ‘타국에서 8개월간의 고생’이라는 면죄부가 만료되었다. 직장도 없이 서른을 맞이한 나는 점점 초조해졌고 집에서 하는 모든 행동들이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뭐라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 했기에 아침에 눈을 뜨면 요기를 하고 호주 여정을 함께 했던 노트북을 챙겨 만철이가 운영하는 카페로 향했다.


초, 중학교 동창 만철이. 어린 시절 나에겐 ‘김’가 성에 ‘철’ 자를 쓰는 그의 외자 이름이 퍽 멋져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친구들 몇몇이 그의 이름 앞에 ‘만’ 자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고 그것이 굳어져 병천에서는 아예 만철이로 통하게 되었다. 친구들이 선물한 미들네임(Middle Name.)이라니. 참으로 낭만적이지 않을 수 없다.


만철이는 내가 호주에 있을 때 병천에 카페를 차렸다. 여느 날과 같이 머핀 브레이크 근무를 마치고 식사를 하고 있던 중, 친구들 사이에서 소위 호사가로 통하는 녀석의 카톡을 받았다. 그 내용은 만철이가 카페를 차렸다는 소식으로 시작해, ‘넌 커피 한다던 새끼가 뭐 하고 있는 거냐? ㅋㅋㅋ’으로 끝맺음되어있었다.


내 옹졸한 소갈딱지가 또 얼굴을 들었다. 씹고 있던 음식을 삼킬 수 없었다. 축하해줘야 할 일인데, 머리로는 알겠는데, 속에서는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누구는 실력 쌓는 답시고 해외에 나와 이 고생을 하는데 누구는 카페에서 일을 해보기는 커녕, 커피를 공부한 적도 없이 카페를 차렸다. 본인의 퇴직금과 부모님의 찬조금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때 알았다. 실력이고 공부고 그저 가진 것 없는 놈의 핑계일 뿐, 내게 부족한 것은 창업 자금, 즉, 돈이라는 것을. 한동안 배알이 꼴렸다.


그런데 막상 병천에 돌아와 카페에 갈 일이 있으면 꼴에 의리 있는 척은 하고 싶었는지, 내 동창 카페 매상 올려준답시고 만철이가 운영하는 카페를 찾게 되었다. 아무튼 독자 여러분께서는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 만철이가 운영하는 카페를 기억해 두시기 바란다. 내 동창들은 이곳을 ‘만카(만철이 카페)라고 불렀다.


만카에 도착하면 한구석에 자리를 펴고 앉아 이력서를 수정했다. 천안부터 세종, 청주, 공주, 진천까지. 잡코리아, 사람인 같은 구직 사이트들을 샅샅이 뒤져 게시된 거의 모든 바리스타 구인 공고에 지원했다. 그러나 지원한 카페들은 그들의 얼굴마담인 자리를 수염자욱이 거뭇한 삼십 대 아저씨에게 내어주지 않았다.




내 불알친구들, 승일과 성진은 일찍이 고향을 떠나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여느 병천의 아버지들이 그러하시듯 승일의 아버지도 농사를 짓고 계셨다. 때문에 승일은 매주 주말이 되면 병천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토요일 밤이면 일을 끝낸 승일과 나는 만카에서 어울렸다.


“야. 그래서 서울로 올라오는 건 영 아닌 거 같어?"


글라스에 꽂힌 빨대를 빨아대던 승일이 말했다. 내가 귀국한 후, 승일은 계속해서 상경을 권하고 있었다. 불알친구를 가까운 곳에 두고 싶은 마음이 첫 번째요. 트렌드의 변화를 주도하는 서울에서 커피를 배우면 지방에서 배우는 것보다 실력 향상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사실상 전자가 목적인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가고는 싶지. 근데 서울 월세 비싸잖어? 내가 수중에 돈이 읎다.”


“왜? 상우, 서울 가게?”


마감시간이 가까워 카페가 한가해지자 사장인 만철이가 다가와 물었다.


“아, 뭔 서울이여, 아녀, 안가.”


앞서간 자를 향한 부러움인지, 없는 자의 열등감인지, 퉁명스럽게 대답이 나왔으나,


“야. 니가 카페를 차릴 거면 천안에서 해도 되는데 응? 배울라믄 커피 그거… 되게 저거 한거 아녀?”


신경 쓰지 않고 설득을 이어가는 승일 덕에 분위기를 흐리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저거한 게 뭔데, 병신아.”


초등학교 때부터 승일은 적절한 단어나 표현을 찾지 못하고 ‘저기하다.’ 혹은 ‘저거 하다.’라고 말을 맺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그 말이 참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서른이 된 지금도 고치지 못하고 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이 지내며 어느 정도 그 뜻을 유추할 수 있게 됐지만 그럼에도 승일의 말 뒤에 꼬박꼬박 “저거한 게 뭔데, 병신아.”라고 묻는 습관이 생긴 것은 참… 유감이라 적고 싶다.


“아.. 그 뭐라고 하드라. 저거… 그… 왜 유행 탄다고 하잖여. 만철아, 그거 영어로 뭐라고 하냐?”


“뭐… 트렌디하다고?”


만철이 답했다.


“그려, 그거! 커피라는 게, 이게 굉장히 트렌디한 거 아녀? 그러믄 여기서 해는 것보다 서울 오는 게 나은 거 아녀?”


“그치. 여기서는 오히려 상우, 니가 가르쳐야지. 그래도 유학파인데. 그리고 이제 좀 꺼져, 새끼들아. 문 닫아야 돼.”


승일을 거드는 만철, 그런 그에게 쫓겨나듯 만카를 나온 우리는 헤어지기 전, 마지막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야, 저기 할 껴?”


“저기가 뭔데. 병신아.”


“집 갈 꺼냐구.”


“그럼?”


“명준이네 가서 맥주나 한 캔 하든가.”


명준 역시 승일, 성진과 더불어 불알친구 중 한 명이다. 이십 대 중반,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논과 밭으로 농사를 지어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친구들 중 가장 빠르게 가정을 꾸렸다. 명준과 그의 처는 병천의 낡았지만 아늑한 아파트 한 채에 두 살 난 아들과 세 들어 살고 있다.


“됐어, 새끼야. 애 있는 집을 이 시간에 왜 가.”


“아, 왜! 와도 된댜.”


“누가?”


“내가 명준이한테 저거 해봤어.”


“됐어, 다음 주에나 보든가.”


“아, 그냥 가게?”


대답 없이 끌고 나온 어머니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백미러로 멀어지는 승일이 보였다.




“어뜨케… 이력서는 넣고 있는겨, 어뜨케 되는겨.”


잠에서 깨어 눈 비비는 토끼 같은 큰아들에게 어머니가 물으셨다.


“천안에서 취직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구요. 서울 한번 디다볼까(들여다볼까.) 하는데…”


“그려. 서울이래두 취직할 수 있으믄 혀 봐야지. 한 번 느봐.(넣어봐.) 이력서.”


“근데 보증금이 없잖어요. 서울이면 비쌀 텐데…”


“엄마가 해줘야지. 뭐… 혀봐.(해봐.)


이십 대 중반, 천안에서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도 월세방 보증금 300만 원을 어머니께 빌렸었다. 빌린 보증금은 월급의 일부를 다달이 어머니 계좌에 입금해가며 갚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나는 서른이 되었다. 이 나이 먹고 수중에 단돈 천만 원이 없어 또 손을 벌렸다. 그럼에도 선뜻 보증금을 내어주신다는 어머니를 봐서라도 하루빨리 일을 구해야만 한다.


마음이 조급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만카로 향했다. 잡 코리아 지역 설정을 서울로 두고 바리스타를 검색하니, 지방으로 검색했을 때와는 다르게  페이지의 끝이 보이지 않는 구인 공고가 나왔다. 이 수많은 곳들 중 하나는 내게 일자리를 내어 주지 않을까. 이력서부터 다시 작성하자.




입사 지원을 하니 며칠 뒤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서른 평생 동안 서울이라고 다녀본 곳이 오롯이 동서울 터미널뿐이라 면접이 잡히면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 이곳을 거쳤다. 천안에서 동서울 터미널이 아닌 고속버스 터미널로 서울을 오가면 약 30분 정도 더 빨리 도착한다는 것은 서울 생활을 시작하고 1년 뒤에서야 알았다.


물론, 이 당시의 나도 남들처럼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이동을 하게 될 때면 여기저기 검색해 가며 빠른 경로를 찾아다니지만 이때의 나는 왜인지, 가깝지만 낯선 곳보다 멀더라도 익숙한 곳이 편했다. 군 시절 나의 동기 한 명이 이런 말을 남겼다.


“스마트폰을 잘 쓰려면 사람이 스마트해야 합니다.”


나란 인간이 세상 모든 촌놈들을 대표할 수는 없지만 원래 촌놈들이란 스마트폰을 손에 쥐여줘도 빠른 길보다는 익숙한 길을 찾는 법이다.


조급한 마음에 심사숙고하지 않고 여기저기 지원했던 탓인지 찾아다닌 면접은 전부 ‘허탕’이었다. 구인 광고에는 더할 나위 없는 복지들과 화려한 사내 문화들이 구구 절절 적혀있었지만 막상 면접 때 그것들에 대해 물으면 ‘아, 그런 거는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라는 한 마디로 간단하게 정리가 되었다. 진짜 괘씸했던 것은 사장님들이 어떻게든 지불할 임금을 줄여 보고자 면전에서 내 이력을 까내리기 바빴다는 것. 경력은 탐이 나지만 제값 치르고 사고 싶지 않다는 심보였을 테다.


심지어 아직 가오픈 중이었던 어떤 카페는 뻔뻔하게도 업장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휴무를 최소한으로 하고 최저임금만 받을 수 있겠냐는 얘기를 대놓고 꺼냈다. 그에 대한 보상은 카페가 자리 잡으면 확실하게 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지만 인생 대부분을 ‘눈탱이’ 맞아가며 살아온 나 인지라, 계약서에 적히지 않은 기약적인 얘기는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면접 당시, 사장님 앞에서는 ‘아이 그럼요. 고생하려면 다 같이 해야지요.’ 하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같이 일해보자는 전화가 왔을 때에는 다른 곳에 취직하게 됐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겪었던 허탕들 중에서 인상에 남았던 곳이 한 군데 있었는데 적자면 이렇다.


구인 공고에 명시된 근무지는 서울이 아닌 강원도에 있는 호텔이었다. 취직만 하게 되면 호텔 복지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위치도 강원도겠다, 돈 쓸 일도 드물 것이라 생각해 지원했다. 며칠 뒤 연락이 왔고 그들은 회장님이 직접 면접을 보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이유로 나를 서울에 있다는 본사로 불러들였다.


안내해준 면접장에 도착하니 살면서 듣도 보도 못한 방송국이 있었다. 자신을 그곳의 PD라고 소개한 깡마른 아저씨가 나를 회장실로 안내했고 회장실은 TV에서 보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굳이 사소하게 달랐던 부분을 꼽자면 회장님 책상 양옆으로 진열된 챔피언 벨트들과 그 뒤에 걸린 거구의 레슬링 선수가 포효하는 사진들 정도? 한눈에 봐도 걸려있는 사진들이 회장님의 소싯적 모습을 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면접은 간단했다. 한 덩치 하시는 노년의 회장님은


“사실 강원도에 호텔은 없다. 아직 짓는 중인데 며칠 전에 첫 삽 떴으니, 이제 금방이다.”


라고 직고함과 동시에, 내게 물었다.


“벤츠나 아우디를 운전해 본 적 있느냐, 바리스타 같은 건 모르겠고 내 개인 비서로 채용하고 싶다.”


나는 답했다. 


“저는 당신의 개인 비서가 아니라 바리스타 면접을 보러 온 겁니다.”


2022년 2월 13일 20시 41분. 글을 쓰며 검색해 보니 이런 행위를 면접 사기라 일컫는다는 것을 알았다. 무려 사기였다니… 사기를 당하고도 좋은 글감이 되겠다는 생각에 그저 해맑았다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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