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나

by 베를린 부부-chicken

by 베를린부부

자존감: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


어렸을 적, 아마도 국민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에 너무나 잘 어울릴 것 같은 숙제를 한 적이 있다. 가훈을 한자로, 그것도 먹을 갈아 서예로 써가는 것이었다. 당시 집의 출입구 위쪽이나 거실 벽 한편에 가로로 기다란 '가훈'을 멋지게 써서 검은색 테두리의 액자로 보관하는 집들이 꽤나 흔했다. 난 한 번도 우리 집에 없던 그 문화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부모님에게 질문을 해본 적은 없었으나 그 날은 숙제 때문이라도 무언가를 만들어야 했다. 어머니는 기어코 아버지의 퇴근으로 나의 숙제를 미뤘고 저녁에 집에 들어온 아버지는 장난기가 살짝 담긴(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거창하게 '가훈'이라는 것을 본인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목소리로 '사랑'이라 쓰라 하셨다. 그럼 '사랑'을 한자로 써야 하느냐 그냥 한글로 써야 하느냐가 다음 과제였다. 한자어로 찾자니 옥편을 뒤져야 하는데 집에는 옥편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이 없었고 구글도 없었으니 그냥 한글로 '사랑'이라 썼다. 물론, 그 뒤로도 우리 집에는 '가훈'이 담긴 액자는 없었고 그냥 구전으로 그렇다더라 정도로 내려온다.


우연인지 아님 무의식 속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꾸준히 내 머릿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 탓인지, 꽤나 자주 사랑의 정의에 대해 곱씹어 볼 때가 많다. 호기심 많은 청소년기에서 혈기 왕성한 20대를 지날 때야 나에게 사랑은 이성을 향한 사랑이었고, 가끔 우아하게 사색을 즐길 때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며 '한 사람을 향한 사랑'에 대해, 그리고 나의 아기와 만나며 '내 아이를 향한 사랑'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됐고 이제는 내가 부모님에게 받았듯, 나도 이 '사랑'의 구체적인 개념을 나의 아이에게 전해줘야 한다. 계속 고민하고 잘 정리를 해 놔야 나의 행동이 되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마침내 '이것이 아빠가 생각하는 사랑이야'라고 전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살짝 과거로 돌아가, 머리가 커져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할 즈음 전에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 굉장히 서툴렀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 가족들에 대한 '사랑', 친구들에 대한 '사랑'등등 굳이 연인 사이의 사랑뿐만이 아니라 조금만 관심 있게 주변을 둘러봐도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랑의 형태가 많고 많지만 나는 그렇게 생소한 채로 어른이 된 것 같다. 굳이 거창하게 가족들끼리 '사랑해'라고 손발이 오글거리는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따뜻하게 이야기하는 장면들은 왜 그리 나에게 어색한지 모르겠다. 스스로 기억에서 지워서 그런 건지, 내가 스스로 거부하고 있었지만 사실 알고 보면 나의 과거에는 사랑이 가득했으나 지금과는 달리 그게 많지 않았다고 느끼는 건지는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배우긴 했으나 어떤 방식으로 누굴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단어의 사용법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리고 이 뿌리를 따라가자면, 누구를 원망한다는 식의 결론이 아니라, 그냥 무뚝뚝하게 혹은 무채색 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너무 일반화가 되어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 또래의 주변 사람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랑 표현에 능숙하거나 과감한 사람은 아주 보기 드물다. 굳이 곰곰이 실눈을 뜨고 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나마 스페인 남자들이 표현에 조금 더 능숙한 것 같기는 하다. 흔히 '움마 움마'라고 불리는, 보통 그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 같은 사람들이 놀려대는, 양 볼을 맞대며 친근하게 인사하는 방식만 봐도 말이다. 그들끼리 유래도 모르는 체 몸에 익은 제스처를 사용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아 나는 언제 저리 세련되게 반가움을 표현할 수 있나' 싶다. 심지어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사람과 이렇듯 온몸을 표현해 반가움과 안부를 교환하다 보면 왠지 모를 위로를 느끼기도 한다. '저 사람이 진짜 반가워하는구나.' 이렇게 말이다.


나는 예전부터 그래도 나 자신을 좀 소중하게 생각했다. (좀 웃긴 뉘앙스이긴 하다.) 그래서 건강에 좋다는 귀찮은 운동도 따라 해 보고 맛없는 것도 덥석덥석 먹어보고 나의 자존감이 침해받는 상황에선 곧 잘 맞서곤 했다. 그런 영향이었는지, 스페인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도 생활비를 아껴 여행도 다니고 스스로 밥도 해 먹으며 최대한 잘 지내려 했다. 그러나 유독, 건축에 있어서는 스스로를 좀 혹독하게 다뤘다. '이것도 몰라?', '이런 건 진작에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말이다. '움마 움마'를 하며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하는 사람보다 나 자신을 덜 반가워 한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반가워하거나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가 나에게 도움이 1도 되지 않느다는 걸 깨닫는 데는 하안참 걸렸다. 아주 다행히 극단적인 경험을 한 뒤로 바뀐 것이 아니라 조금씩 내가 집착하는 것들에 대해 적당히 무관심해지는 시간을 지나며, '아 그러지 않아도 되는구나'를 깨달았다.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무언가를 잘하기 위해 나 자신을 옥죄는 생각이나 행동이 나를 갉아먹는구나'. 이 문장을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다시 쓰자면, '무언가를 사랑하기 위해 가장 사랑해야 할 나 자신을 덜 사랑한 것'이 된다. 그리고 또다시 이 문장을 나의 경우에 적용하자면, 나 스스로에게 '건축을 조금 못해도 괜찮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가 된다.

물론 나 자신에게 더 관대해 지기 위한, 스스로 쥐어짠 관용일 수 있다. 어딘가 서툴고, 안 되는 능력을 인정해야 하며 내 생각보다 별로 더 뛰어나지 못한 나의 능력을 감싸기 위한 일종의 비상구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게 핵심 단어이다. 사람은 누구나 느슨해질 수 있는 비상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직업은 건축가이지만 내가 건축을 다소 못한다 해도 괜찮다. 나에게는 충분히 나다운 여러 다른 모습의 내가 있으니까 말이다.

IMG_1319.JPG 티어가르텐(Tiergarten, Berlin)에서 쿠담(Kurfürstendamm, 줄여서 Ku'damm) 쪽으로 바라본 풍경

때론 바보 같은 실수도 하고 고개를 들 수 없는 쪽팔린 행동도 하며 상대방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실례를 범하는 나는, 나 스스로가 가장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번에 '살짝이라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실수를 딛고 '괜찮아. 다음번에 잘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를 독려하는 사람. 자신을 사랑해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건축을 좋아하고 물론 잘하고 싶지만 자신의 생각만큼 잘하지 못해도 자책하지 않는 사람. 이것이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사랑'이란 핵심 단어에 내가 붙일 수 있는 나만의 수식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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