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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Oct 28. 2020

부다페스트 '사고, 그 후'

부다페스트 이야기



2019년 5월 29일, 밤 9시경.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



우리나라 단체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대형 리버 크루즈에 부딪혀 침몰된 사건이었다.

(*현재까지도 -2020.10.28일 기준- 실종된 한 명을 발견하지 못했다. 주헝 한국 대사관에 실종자 수습을 위해 공지가 띄어져 있는 상태이다)




그로부터 일 년이 훌쩍 지났다.


최근 들어 강변에서 러닝을 자주 하는데, 사고가 발생한 머르깃 다리를 지나갈 때면, 그때의 그 마음이 나를 괴롭힌다. 한동안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밤만 되면 잠을 못 이루었다.


작년 5월, 그 사건 현장에 있었고, 그날따라 비가 처벅처벅 내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독 '슬픈 빗소리'라고 생각했다. 그 사건이 내가 겪을 일이 될 수도 있었고, 그렇지만 그게 누구 여서도 안 됐다. 




그런 일은 있어선 아니 됐다.




'그래도 네가 아니어서 다행이다'라는 말은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사건 다음 날, 눈을 떠보니 한국에서 온 카톡 메시지와 보이스톡 전화로 휴대폰이 꺼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일일이 답을 하기가 버거워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두고 엎어놨다. 전날 있었던 일이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야경 배를 타고 출발 한지 5분 만에 선박 회사 직원이 내게 다가오더니 "사람이 강물에 빠졌어요. 배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으니 다시 되돌릴게요"라고 말했고, 종종 강물에 투신하는 사건이 있었던 다뉴브 강이라 그런 류의 사고일 것이라 생각했다. 집에 가서 뉴스를 틀었다. 잘 보지 않은 헝가리 'MTV'. 삽시간에 배 사고 관련 뉴스로 헝가리가, 아니 전 세계가 들썩였다.



지난여름, 사고가 일어난 머르깃 다리 주변은 차마 쳐다보지도,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장소가 되었다.

다리를 거쳐 가는 버스나 트램도 사고 후,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탈 수 있었고, 모두들 그 장소를 지나갈 때면 아득한 눈으로 강을 응시했다. 애써 시선을 주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보였다. '없었던 일처럼 여긴 게 아니라,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는 마음'으로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후, 몇 달 동안 한국과 헝가리는 사건 수습에 국력과 인력을 총동원했고, 헝가리에 주재하고 있는 한인들의 손길이 분주해졌었다. 통역, 사고자 가족들을 돌보는 일, 사고자 수습 등의 일로 모두가 힘을 다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 엄마가 나를 보러 헝가리에 방문했는데,

준비했던 여행 계획은 다 접어야만 했고, 서로 진정되지 않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매일을 보내야 했다.



배 사고 5년 전, 엄마와 영국 여행을 할 때, 세월호 사건이 터졌고, 이번엔 헝가리 배 사고였다.

엄마는 아침, 낮으로 집에서 도보로 30분 남짓 되는 거리인 머르깃 다리를 출근하듯이 오며 갔고, 자다 일어나면 엄마는 "그곳에 가서 기도를 하고 왔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말을 잘 이어가질 않았다. 그것이 이번 여행에 부여된 본인의 몫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사고 이후, 사람들은 헝가리를 ‘여행하기 안 좋은 곳'이라 여겼고, 헝가리 사람들을 다 이번 사건의 피의자로 매도했다. 온갖 낭설이 난무했고, 어느 순간부터 뉴스가 보기 싫어져 의식적으로라도 그 내용을 피했다. 

피해자들이 말이 없었고, 그 외 모두가 '사건 죽이기'에 혈안이 된 것처럼 느껴지던 지난여름이었다.



사실, 정말 사고였다. 다만 절대 있어서는 안 됐을 사고.



머르깃 다리_이 다리 아래에서 사고가 발생했고, 여전히 곳곳에 추모의 흔적이 남아있다. (2020. 가을)                                         




코로나 시대가 도래된 이후로 '이러다 지구가 곧 끝이 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나를 종종 무력하게 한다.

뒤에서 아파할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도 굴뚝이고, 나도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받고 싶단 마음도 굴뚝같아서 내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따뜻함과 차가움으로 이리저리 뒤엉킨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우리는, 각자는, 오늘을 살아간다. 살.아.가.야.하.고. 살.아.내.야.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해 보였던 옛날을 종종 떠올린다. 그땐 뭐가 그리도 용감무쌍했는지.

그리고 다시 되묻는다. 지금은 뭐가 그리고 어렵고, 겁이 나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한 '나'인데 말이다. '결국엔 마음 문제인가'로 결론이 난다.

최근 나는, '감정 컨트롤'이란 것에 대해 '이성적인' 접근을 시도해 보고 있다.

나란 사람은 그동안 성취감이란 것을 '무엇'을 '하는'지, 눈에 보이는'어떤' 결과를 이끌어 냈는지에 대한 것으로 치부해 왔었다.

그럴 때마다 그 집중이 '내 안에서'가 아닌, '외부의 시선'으로 변해 나를 옭아맸는데, 요즘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에 대해 부단히,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감정'으로의 접근이 '인지'와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가 싶을 정도로 이 '의식적인' 노력은 꽤나 '좋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전엔 화가 나면 말 그대로 '열이 뻗쳐 표출' 했다면, 지금은 '이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로 되짚어 보는 최소한의 마음 문 두드리기는 해 본다는 것. 또 예를 들면, 한국에서 헝가리로 돌아왔을 때, '죽을 것만 같은' 막연히 불안한 감정이 들 때, 이것이 ‘정말 죽을 정도로 괴로운 것인가, 영영 끝나지 않을 고통인가, 정말 고통은 맞나'라고 짚어보는 수준의 노력은 해보고 있다는 것.


신기하게도 이 의식은 꽤나 효과가 있다. (물론 이런 노력조차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될 정도의 무력한 침울함이 엄습해오기도 하지만 말이다.)



한 마디로, '너무 힘들어도', '너무 행복해도' 이 모든 것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라는 결론.

결국 '순간' 감정은 지나가고,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다는, 죽을 때까지 이런 주기가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면 스스로에게 지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냥 이것도 하나의 필요한 과정'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단순한 명제(?)로 만든다.



이 감정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전달될만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 몇 번이나 읽어봐도 갈피가 잡히진 않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을 위해 오늘도 난, '내 마음에 최선을 다한' 이 글을 내보낸다. 







자연스레 시대의 피해자가 되고 만 파티마의 가게 선반은 썰렁하게 비었고, 창문들에는 1920년 이래로 종이가 도배되어 있었다. 이 호텔에서 가장 밝았던 곳 가운데 하나인 꽃집이 가장 고적한 곳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 (중략) 글쎄, 파티마 가게는 폐업 했는지도 몰라. 백작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파리의 꽃집들도 로베스피에르 '통치' 시기에 문을 닫았었지만, 지금 그 도시에는 꽃들이 넘치고 있지 않은가? 그와 마찬가지로 메트로폴에도 꽃이 풍성해지는 때가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 


「모스크바의 신사 - 중에서, 에이모 토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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