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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Oct 28. 2022

비참한 날엔 아사이볼을 먹자

브라질 | 아사이볼

브라질은 참 멀었다. 인천에서 런던까지 12시간, 다시 상파울루까지 또 반나절, 출장지인 헤시피까지 국내선을 타고 3시간을 가야 했다. 출발한 지 꼬박 하루가 훌쩍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박수를 치는 사람들 속에서, 남미 특유의 흥을 느꼈다. 월드컵을 한 달 앞둔 때였다. 치안에 대한 뉴스가 많이 흘러나왔다. 브라질 사무소 직원도 신신당부를 했다. 


“모든 촬영은 오후 6시엔 마쳐야 해. 그 이후엔 우리도 너희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어.” 


단호한 그녀의 말에 피디는 괜찮다고 말했다. 같이 온 동료와 나의 예견된 고난이 몰려오고 있었다. 브라질 출장은 회사에서도 처음이었다. 브라질 사무소의 주최로 열린 청소년을 위한 국제 행사에 국내 아이들이 참여하게 됐다. 각자의 사연으로 국내 촬영을 마쳤고, 브라질의 일정도 함께 담아야 했다. 다큐멘터리 방송이었다. 


“피디님, 아까 직원 이야기 들으셨죠? 가이드라인 잘 지켜주셔야 해요.” 

“아, 괜찮을 거예요.” 


뭐가 자꾸 괜찮다는 건지, 그는 다른 촬영으로 남미를 경험한 적 있다며 걱정 말라고 했다. 우리의 입장은 달랐다. 약속된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아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한국팀을 초청한 이들이 난처하게 된다. 회사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만약 현장, 지역주민들과 문제가 생긴다면 잠시 방문한 우리는 떠나면 그만이지만, 현장의 직원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촬영 중 만난 플라스틱 병뚜껑으로 만든 브라질 국기


힘든 출장이었다. 가이드라인을 무시하는 제작진으로 인해 현장 직원 사이 칼바람이 불었다. 촬영 결과물이 흡족하지 않은 피디는 저녁 내내 우리에게 말했다. 


“아시잖아요. 그림이 안 나오면 비참해요.” 


그림에 욕심을 내는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첫 직장이 방송국이었으니까, 나 또한 피디가 찍어온 테이프를 보며 ‘결정적 한 컷’을 아쉬워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잘 해내는 이들도 세상엔 많다. 쉼 없는 촬영이 이어지던 어느 날, 본격적인 다음 촬영을 앞둔 일요일 하루. 숨을 돌릴 수 있는 자유시간이 생겼다. 3주의 출장 기간 중 딱 하루의 데이 오프였다. 


“오늘 잘 쉬시고 저녁에 뵈어요. 해변엔 절대 혼자 나가시면 안 돼요.” 


두 명의 피디에게 당부를 하고 동료와 숙소를 탈출했다. 야호! 드디어 그들로부터 해방이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브라질 직원이 알려준 마켓, 쇼핑몰의 푸드코트에서 아사이볼을 주문했다. 공항에서 봤던 브라질의 전통 건강식, 아사이볼은 슈퍼푸드 아사이베리를 냉동 스무디로 만들어 그 위에 과일을 얹은 것이다. 꾸덕꾸덕하고 차가운 질감, 바나나, 블루베리, 치아시드를 얹은 아사이볼을 수저로 푹푹 떠서 먹었다. 출장 내내 풀썩 주저앉았던 마음에 생기가 돌았다. 오늘의 기운으로 남은 한 주도 씩씩하게 이겨내자고 서로의 마음을 다졌다. 잔뜩 술에 취한 피디가 전화가 왔다. 그들의 방으로 갔더니 가이드라인을 무시한 그는 홀로 해변에 나갔다가, 핸드폰을 도난당했고, 얼굴엔 보라색 멍이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왜 저희 말을 안 듣고 혼자 나가셨어요. 비참한 상황이 생겼잖아요.’ 정말 더 큰 사고가 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출장을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로수길에 아사이볼 전문점이 생겼다. 줄을 서서 먹는다는 그 가게에서, 브라질에서 먹던 값의 두 배는 비싼 아사이볼을 주문했다. “아, 브라질에서 먹던 그 맛이 안 나네. 양도 상당히 적고, 이러면 우리가 상당히 비참한데...” 지나고 나니 ‘비참’이란 단어가 우리 사이 유머가 되다니. 세상에. 아사이볼을 먹으며 함께 깔깔 웃었다. 


Recife, Brazil _ 보라색의 아사이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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