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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Sep 07. 2024

고모의 마음

조카와 헬로카봇 올스타 스페셜을 보러 극장에 왔다.


올해 여섯 살이 된 조카는 헬로카봇에 한창 빠져 있다. 어제는 헬로카봇 뮤지컬을 보았고 저녁 내내 킹가이즈x와 아이언크루로 역할 놀이를 해야 했다. 조카의 방은 여기저기서 받은 카봇으로 가득 차 있었고 거기에는 지난 어린이날에 내가 사준 하이퍼캅스도 있었다. 드로캅, 이그리붐, 서포티붐, 푸르디붐이 포함된 7만원 상당의 장난감이었다. 작년에는 최강 5대가 합체되는 크리스탈 펜타스톰 한정판을 사기 위해 온 가족과 친척이 동원되었다. 무려 17만원대에 이르는 고가의 상품이었다. 요즘 장난감은 우리 때와는 레벨이 달랐고 비용도 사악했다. 종류는 어찌 그리도 많은지.


어두운 극장에서 조카가 집중하며 헬로카봇을 보는 동안 나는 꾸벅꾸벅 졸았고 중반부터는 기억이 아예 삭제되었다. 헬로카봇 주제곡이 연달아 나올 때 비로소 깨어나 보니 조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고 있었다. 또래보다 키가 크지만 어눌한 말투에 남 앞에 나서는 걸 부끄러워하는 조카였다. 그런 조카가 이십여 명의 아이들 중에 혼자 일어나 춤을 추고 있던 것이다. 귀여운 조카의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났다. 조카의 머리에는 어제 헬로카봇 뮤지컬에서 받은 머리띠가 둘러져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조카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개구리처럼 폴짝 뛰는 거야. 하나, 둘, 셋."


조카는 나의 구령에 맞춰 폴짝 뛰어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렸다.


"잘했어."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조카는 여전히 헬로카봇 머리띠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또 한 번 웃음이 났다. 어제 뮤지컬을 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난감보다 티켓 값이 훨씬 비쌌지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고 싶은 고모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조카가 커서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면 너무 큰 기대일까.


조카에게 간단한 선물이라도 사줄까 싶어 어린이용 잡화 매대로 향했다. 조카는 귀신같이 헬로카봇을 찾아냈다. 차탄이와 라이프 세이버가 프린팅 된 파란색 비치백이었다. 조카의 눈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이거 주세요."


직원이 결제를 하면서 조카의 머리띠를 보고 한마디 했다.


"너 헬로카봇 엄청 좋아하는구나."


조카는 부끄러운 듯이 가방을 받아 들고는 어깨에 다. 그리고는 기분 좋아졌는지 앞장서며 다른 매장으로 향했다. 영유아 용품을 파는 매장이었다. 조카가 내 손을 잡으며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말했다.


"채원이 신발을 사주자."


채원이는 조카의 동생이자, 최근 뒤집기에 성공한 나의 두 번째 조카였다. 순간 지난달 통장에 꽂힌 월급이 생각났다. 어제오늘 얼마를 썼더라. 집에 가는 길에 주유소에 들러 기름도 넣어야 했다. 내가 짐짓 웃으며 대답했다.


"채원이 걷지도 못하잖아. 누워있는 애를 신발을 사주자고?"

"앞으로 2년 후를 준비해야 돼."


헛웃음이 났다. 2년 후를 왜, 어째서, 지금 준비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카의 제안을 에둘러 거절했다.


"그럼 그때 사자. 지금 말고."

"그래? 그러자, 그럼."


다행히 조카는 빠르게 제 의사를 굽혔다. 그럼 양말이라도 사주자는 이야기를 애써 무시하며 빠르게 이동하는데 조카가 이번엔 엄마에게 머리끈이 필요하다고 했다. 마침 올케의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머리끈 정도야. 그 정도는 괜찮지 싶어 액세서리 매장으로 향했다. 조카는 매대를 둘러보더니 하나를 으며 말했다.


"이거 어때?"


조카는 내 카드를 자기 카드로 아는 모양이었다. 원하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조카의 모습은 귀엽고 엉뚱했지만 그 와중에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 중이었다. 기름도 넣어야 하는데. 넣지 말까. 그래도 그건 좀 그렇지 않나. 그러는 사이 조카는 머리끈을 종류마다 집으며 이거 어때, 이거 어때, 하고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거 엄마 취향 아니야, 엄마는 그런 거 안 좋아해, 하며 제지했고, 조카는 그래? 하며 물건을 내려놓았다. 계속 머리끈을 주시하는 조카에게 말했다.


"엄마는 머리가 짧으니까 머리끈 말고 머리띠 어때?"


조카는 호기심을 갖고 내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플라스틱 모형 진주가 부착된 머리띠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런 거 엄마가 좋아할 거 같은데. 진주 머리띠."


조카는 어눌한 말투로 진주, 진주 따라 했고 나는 머리에 착용하며 이렇게 쓰는 거야, 하며 보여줬다.


"어때?"

"그래, 이거하자."


조카가 자연스럽게 진주 머리띠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나는 조카의 뒤를 따라가 여직원에게 카드를 건넸다. 계산을 마치고 조카의 헬로카봇 가방에 머리띠를 넣어주며 말했다.


"이따가 엄마 머리에 직접 씌워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유소에 들렀다. 셀프로 주유를 하면서도 얼마를 넣어야 할지 상당히 고민되었고 결국 3만원넣었다. 조카의 헬로카봇 가방과 진주 머리띠를 사지 않았다면 5만원어치 넣었을 것이라 타협하며. 조카는 알까. 이런 고모의 마음을.


집에 도착했을 때 올케는 조카의 헬로카봇 가방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조카가 가방에서 진주 머리띠를 꺼내자 올케는 또 한 번 깔깔대고 웃었다. 그리고는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엄마 진주 귀걸이랑 진주 목걸이 갖고 싶다고 한 거 기억하고 있었네."


그러면서 얼마 전 자신의 생일날에 내 동생(올케의 남편)과 조카에게 그 말을 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올케는 그 일을 기억한 자기 아들의 세심함과 기억력에 고무된 듯 보였다. 나는 진짜, 하며 짐짓 맞장구를 쳤고, 사실 내가 고른 거야, 고 말하지 않았다. 올케는 크게 감동한 눈치였고 나는 그 기분을 깨지 않기로 했다.


조카가 이런 고모의 마음을 언젠가 반드시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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