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아니지만 인생을 바꾸게 되는 사건들이 있다. 내게는 ㄱㅊ 사건이 그러했다. 그날 이후 건강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그중에서도 먹을거리에 대해.
오랜 자취 경력이 무색하게도 나는 음식을 할 줄 모른다. 특히 손맛이 중요한 한식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다. 어떤 국을 끓여도 똑같은 맛이 났고 하나같이 맛이 없었다. 브로콜리를 삶으면 설익거나 푹 익었고, 인터넷 속 레시피를 따라 해봐도 뭔가 빠진 맛이 났다. 당연했다. 재료가 한두 가지씩 빠졌으니까. 그렇다고 아주 가끔 필요한 고춧가루, 양조간장, 참치액, 매실청 같은 재료를 살 수는 없었다. 55ml짜리 참기름은 유통기한이 지나도록 냉장고에 짱 박혀 있었고 굴소스는몇 번 쓰지도 않았는데 곰팡이가 피어 버리게 되었다. 언젠가 시장에서 밑반찬을 사 온 적도 있지만 일주일도 못 가 상해버려 아예 사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뭘 먹느냐고? 식단은 의외로 건강하다. 조미하지 않은 원재료를 그대로 먹으니까. 엄마가 고향에서 보내준 상월고구마를 에어프라이어에 구워 먹거나 자연 방목으로 생산된 계란을 삶아 먹는다. 식후 과일은 필수다. 과일을 먹으면 군것질의 양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입이 심심할 때면 견과류나 그래놀라를 아작아작 씹어 먹는다. 샐러드도 자주 먹는 편이다. 양상추를 한 통 사 오면 며칠간 의무적으로 샐러드를 먹어야 하는데 (안 그러면 음식물 쓰레기가 되므로) 실제 냉파스타는 나의 주종목이다. 조리가 필요한 육류나 어류는 거의 먹지 않고 외식 때 먹는다.
밥을 안 먹은 지 좀 되었다 싶은 날에는 시중에 파는 양념을 활용한다. 모 대기업에서 판매하는 사골육수로 낸 고깃집 된장찌개와 멸치육수로 낸 강된장 양념은 찬장에 항상 구비되어 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곤 각종 야채를 사 와 잘게 썰어 넣는 일뿐이다. 의외로 인스턴트는 잘 먹지 않는다. 이삼십 대 라면의 장기 과다 섭취로 물려서인지 신라면 건면 5개입 한 봉을 사 오면 2개월 정도 먹는 것 같다. 유일하게 시켜 먹는 배달음식이 엽기마라떡볶이였는데 이 마저도 ㄱㅊ 사건 이후 중단되었다.
이런 나를 아는 엄마는 일 년에 서너 번 오래 묵혀 먹을 수 있는 오이장아찌나 김치, 우엉조림, 멸치볶음, 누룽지 같은 걸보내주신다. 물론 집에서 직접 재배한 상월고구마도 함께. 그러면 거의 두 달을 먹는다. 별식이 당길 때는 옥상화단에 심은 루꼴라로 또띠아 피자를 만들거나 당근호두파운드케이크를 굽거나 수제 버터쿠키를 만들어 먹는다. 의외로 이런 것들이 조리가 간편했고, 레시피 대로 하면 실패할 확률도 낮았다.
최근에는 위에 좋다는 양배추를 줄곧 먹고 있다.사람머리만 한 양배추 한 통을 사 와 매일 아침 우유와 함께 갈아먹고, 참깨드레싱을 얹어 샐러드로 먹고, 계란에 풀어 양배추 전을 먹고 남은 건 피클을 담그고, 라페를 만들어 두었다. 다행히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ㄱㅊ가 멎은 걸 보면. 이 밖에 아침에 일어나면 빈속에 들기름을 한 스푼씩 마시고 있다.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데 효과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낮에는 느릅나무껍질을 우린 물을 수시로 마신다. 체내 염증 완화에 좋다고 엄마가 그랬다. 엄마는 이런 것들을 잘 알았다.
지난달부터는 한 생활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비건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친환경으로 재배된 농산물로 직접 요리를 해먹는 모임인데, 이번 달 메뉴는 가지덮밥과 된장국이다. 솔직히 내 손으로 가지를 사본 일이 없다. 게다가 시판 양념 중에 된장찌개는 있어도 된장국은 없다. 고로, 나는 된장국을 끓여본 적도 없다. 이번 기회에 옆에서 거들며 잘 배워볼 셈이다.
You are what you eat-네가 먹는 것이 바로 너다, 라는 오래된 표현이 있다. 건강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신체를 비롯해 정신건강 더 나아가 유전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먹는 것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다. 허기를 달래면 그만이었고,특히 원룸에 살 때는 외식음식과 인스턴트, 군것질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렇다 보니 항상 피곤했고, 피부 트러블이 자주 올라왔으며, 여러 여성 질환에 자주 노출되었다. 나는 그것이 나이가 드는 까닭 정도로 여겼고 개선이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었다. ㄱㅊ 사건은 나의 식생활과 건강상태를 돌아보고, 나에게 더 좋은 먹을거리를 공급해 주기로 약속하는 계기가 되었다.그동안 나를 지탱하느라 분투했던, 하지만 외면받았던 소중한 나를 위해. 아직까지 그 약속은 그럭저럭 지켜지고 있는 것 같다.
만약 당신이 먹는 데 관심이 없다면, 제때 끼니를 챙기지 않고 거르거나 대충 해결하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내팽개치고 있다는 뜻이다. 몸은 다 기억하고 있다. 당신이 언제 어떤 음식을 얼마나 먹고 있는지 몸은 하나하나 축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내가 먹는 것이 나이기에.
에프에 구운 당근호두파운드케잌 / 다이어트식 아니고 일반 식사
엄마가 보내준 밑반찬과 시판양념에 야채를 썰어넣은 순두부찌개 / 화단에 직접 키운 루꼴라로 만든 또띠야 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