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잠깐 볼 수 있어?’
‘응 오후에 보자’
그녀가 어젯밤에 보낸 문자이다. 잠깐 보자는 말.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느 한쪽이 누구나 납득할 만한 잘못을 해서 관계가 끝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저 그 관계의 수명이 다해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몇 번의 연애를 하면서 알게 된 경험치 중 그다지 기분 좋지 않은 것이 그 끝을 직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아마도 그녀와의 관계가 끝이 날 거 같았다. 그렇기에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오늘의 만남을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걸 알기에. 이것 역시 경험이 알려준 서글픈 사실이라 덤덤히 받아 드려야 한다는 것 역시 잘 알기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커피처럼 우리 역시 마주한 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이상하리 만큼 편안해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난 후의 표정처럼.
“우리 이제..”
“내가 더 노력해 볼게. 나한테 한번 더 기회를 주면 안 될까?”
그녀가 무언가 하려는 말을 가로막고 내가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너무도 잘 알았기에. 그 말이 그녀의 입 밖으로 나와 버리면 다시는 주어 담을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아니야 오빠는 좋은 사람인 거 잘 알아. 그리고 오빠가 지난번에 이야기 한대로 오빠가 한 거짓말들이 어찌 보면 다 사소한 것일 수도 있어. 그리고 여전히 나한테 다정하고 고마운 사람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근데 이젠 내가 조금 지쳐서 내가 더는 못 할 것 같아. 미안해”
“내가 더 노력하면 우리 관계는 나아질 수 있어. 내가 옆에서 지친 마음 회복 될 때까지 더 잘할게.”
“오빠는 지금도 충분히 나에게 잘하고 있어. 더 잘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내가 앞으로 오빠가 하는 말이나 하는 일에 대해서 의심할 나의 모습이 싫어. 그리고 그런 의심을 하는 내가 오빠 옆에 있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러니까 우리 이제 그만하자. 미안해”
너무도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그녀에게 더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생각한 후 하는 말이라는 것이 그 표정에서 너무 느껴졌다.
“그래…. 헤어지자. 미안해”
그 한마디로 ‘그대’는 ‘그때’가 되어 버렸다. 1년 남짓한 시간이 무색하게.
그녀와 헤어진 후 난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일에 몰두하였다. 박대표가 보고 놀랄 정도로. 그런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첫 번째 투자가 잘 마무리되어 좀 더 수월하게 회사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봐야 아주 조금이지만.
팀 규모도 조금 커져서 현재는 나 포함해서 7명이 되었다. 기존에 나와 함께 합류했던 팀원 역시 짧은 시간 동안 제법 눈에 띄게 성장해서 옆에서 지켜보는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하루 다시 살기’ 역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히 궁금하고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왜 나에게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알아낼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 이메일 받기 전까지는.
그날도 어김없이 퇴근을 하고 운동을 한 후 집에 들어왔다. 샤워를 하고 랩탑을 켜 개인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로그인을 하고 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발신인에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는 메일 한통을 보고.
‘어 뭐지? 다시 만나자는 내용일까?’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몇 분 동안 열어 보지 못하고 주저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열어 보았다.
‘잘 지내고 있지? 난 그냥저냥 지내고 있는 거 같아.
여전히 마음이 힘이 들긴 하지만 차츰 나아지고 있어. 오빠도 그렇기를 바라.
내가 갑자기 메일을 보내서 놀랐다면 사과할 께. 하지만 오빠에게 말을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시작한 그녀의 메일의 내용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어려서 발레만 하다가 첫사랑을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했다는 이야기, 그 남자가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해서 너무 힘들었다는, 그래서 본인이 거짓말하는 사람을 그렇게 못 견뎌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남자와 헤어진 후 오랜 시간 힘들어하다가 나를 만나기 전 다른 남자와 연애를 했는데 그때 기이한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그 남자가 무슨 실수를 해서 자기의 기분을 상하게 했거나 거짓말을 해서 자기를 실망시킨 날 본인도 그날을 하루 더 살 수 있고 그 남자에게도 하루 다시 살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생겼다는 말.
처음에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럼 나만 하루 더 살 수 있었던 게 아니란 말인가? 그녀 역시 하루를 더 살 수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 뭐 다 모르겠고 이걸 그녀가 조정할 수 있다는 건가? 맙소사’
이런 생각과 함께 그 간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중간중간 뭔가 알고 있었던 거 같았던 그녀의 말이나 행동까지. 그리고 어떻게든 그 상황만 모면해 보겠다고 했던 나의 수없이 지질한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그런 행동들을 그녀는 이미 알 고 지켜보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집 안에 나 혼자만 있었지만 어디든 숨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분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본인을 실망시킨 행동을 마치 ‘한번 더 기회를 줄 테니 잘 만회해 봐라’라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메일을 다 읽고 책상의자를 뒤로 젖히고 천장만 한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너무도 오랜만에 무의식적으로 그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런 Tlqkf….”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