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내가 괜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을 뿐이야
주황 블록을 밟고 나서는 초록 블록을 밟아야 해.
가로로 된 블록은 밟으면 안 돼. 세로 블록만 밟을 수 있어.
왜인지는 모르겠어. 그냥 내가 그렇게 정했을 뿐이야.
그냥 내가 괜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을 뿐이야.
- 블록
#위로 #힐링 #시집 #담쟁이에게 보내는 시
어릴 때 다들 그런 경험 있지 않나요. 색깔이 있는 블록만 골라서 걸어야 해. 횡단보도에서는 흰색 부분만 밟아야 해. 괜스레 규칙을 만들어 혼자만의 놀이를 하며 길을 걷던 기억. 저는 아마 횡단보도에서 흰 부분이 아닌 검은 도로를 밟으면 상어에게 잡아먹힌다고 정했던 것 같은데 왜 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요즘도 가끔 해요. 버릇이 되어버린 탓인지, 추억의 느낌 덕인지 사소한 재미를 느끼며 아무도 모르게 보도블록을 번갈아 밟죠. 다 커서 뭐 하는 걸까 싶으면서도, 여전히 좋은 걸 어떻게 하나요. 그런데 유독 마음이 안 좋던 하루는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요. '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이건 잘하는구나'라고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맛이 조금 썼지만, 이 시를 볼 때마다 약간씩 마음이 풀리는 스스로를 보며 이 작은 게임이 나를 위한 좋은 처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 커도 어린 부분이 많은 어른이를 다독이는 방법 말이에요.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줄 작은 핑계를 만드는 것. 나쁘지 않은 처방 아닌가요.
- 담쟁이에게 보내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