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불면으로부터의 자유

by 해진

이제 겨우 철이 들어 상식을 제대로 익히기도 전임에도, 모든 일에 탁월함을 탐하던 시절이 있었다. 평범한 상태에서도 추구할 수 있었던 내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만 눈은 먼 곳을 향하면서 모든 것이 불안했던 시절. 어쩌면 그러한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내 인생에서는 허영이 아닐까라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자주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그때부터, 내 몸은 점차 불면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젊은 시절부터 나의 수면 시간은 다른 사람의 그것에 비해 유난히 짧았다. 종종 밤을 새우며 내가 좋아하는 일에 빠져들곤 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나는 그런 증상에 대해 어떠한 병명도 붙이지 않았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온갖 매스미디어(mass media)의 영향으로 사십 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나의 이 증상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을 '불면증'이라 명명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온갖 자구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불면을 치유하기 위한 책들은 모두 구해 읽었고, 관련 TV 프로그램도 체크해 두었다가 빠짐없이 시청하곤 했다. 물론 그로부터 얻은 정보는 반드시 실천에 옮겼다. 잠자리에 들기 전 따뜻한 우유 한 잔이나, 평소에 멜라토닌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불면증에 도움이 된다는 체리, 바나나, 상추, 그리고 호두 등을 식사 때마다 챙겨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의 불면증은 조금도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밤을 꼴딱 새우는 일도 여전히 흔했고, 이로 인해 우리 가족들도 알게 모르게 나의 불면으로 인한 피해자가 되었다. 내가 어쩌다 일찍 잠들기라도 하면, 남편과 딸은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다녔으며, 심지어 숨소리까지 낮춰야 할 지경이었다. 또 어떤 날은 책을 보다가 소파에서 아무것도 덮지 않은 채 잠이 들었는데, 남편이 내가 추울까 봐 살짝 담요를 덮어 주자, 그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내가 그에게 원망 섞인 불평을 퍼붓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잠에 관해서는 까탈을 부리는 사람이 되어 갔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여행가 한비야가 이틀에 한 번 잠을 자고서도 멀쩡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나도 가만히 나의 수면 시간을 계산해 보니, 주당 평균 25시간 정도는 되는 것 같아, 그때부터 왠지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상당히 오랜 기간 이런 패턴의 수면 시간을 유지하며 살아왔지만, 아직까지 잠을 못 자서 병이 난 적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았다.

그 후로 나의 불면에 대한 의식은 확연히 달라졌다. 나이가 들면서 전보다 세상을 보는 눈도 한결 편해져서 가장 필요할 때 비열하게 나를 버리고, 전혀 필요하지 않을 때 나에게 달려드는 못된 기억들이 하필 잠들어야 할 시각에 패악을 부려도 이제는 거뜬히 물리치고 잠에 빠질 수 있는 면역력까지 생겼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며 내 안에 좋은 기억들을 많이 저장해 나가면 삶은 저절로 더 편안해질 것이고, 그로 인해 양질의 수면도 어부지리로 얻어지지 않을까?

앞으로도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불면의 날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불면증'이란 부정적인 언어는 쓰지 않을 것이다. 너무 좋은 일이 많아 달뜬 마음에 잠 못 드는 밤도 종종 있을 수 있으므로…


Photo by Karolina Kolacz on Unsplash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잠 못 드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