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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홈즈 Feb 15. 2023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재독(再讀) 감상문(23.02.13)

2004년경 ‘미쳐야 미친다/정민 저’를 읽고 이덕무를 찾다 만나게 된 책이다. 미쳐야 미친다를 다시 읽은 김에 이 책도 다시 집어 들었다. 삼독(三讀)인지 사독(四讀)인지 기억이 없으나 기록을 보니 나는 이미 이 책에 대한 7~8번의 소감문이나 관련 글들을 쓴 흔적이 있다. 

책을 읽는 동안 250여 년 전 백탑(원각사지10층석탑) 주변을 서성였을 조선 청년들의 한숨과 웃음소리가 내 곁을 떠나질 않았다. 그 청년들 속에는 나도 있었다. 책을 덮고 나니 다시 가슴이 벌렁거린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백동수, 박지원, 홍대용... 책 속 인물들이 튀어나와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제는 마치 내 동무들 같다. 


[P249 시간을 나눈다는 것은, 반드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옛사람들로부터 나는, 그들의 시간을 나누어 받기도 한다. 옛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이 오롯이 담겨 있는 책들, 그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산과 들을, 내 안에 스며 있는 그 시간들을 느낄 때면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중략)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와 나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시간을 나눌 수 있다. 옛사람과 우리가, 우리와 먼 훗날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 나누며 이어지는 시간들 속에서 함께 하는 벗이 되리라.]


책 속에 빠졌다가 문득 나는 다시 현실로 소환되었다. 거울에 비친 초로의 사내 때문이었다.

‘그때 그 청년은 어디로 갔는가?’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0.1g만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자던 다짐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덕무는 1793년 불과 쉬운 셋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내 나이 벌써 이덕무 보다 몇 년을 더 살았는데 나는 지금까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였는지, 이덕무의 청장서옥 같은 사랑방은 가졌는지, 아니 사랑방은 치더라도 좋은 벗들은 가졌는지,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특히 ‘나는 벗들에게 좋은 벗이 되었는가?’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강원도 인제 땅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동수에게 벗 박제가가 써준 편지 ‘가난한 날의 특별한 벗’이라는 편지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P121 ‘하늘 아래 가장 고귀한 우정은 가난할 때의 사귐이라 합니다. 벗과의 사귐은 술잔을 앞에 두고 무릎을 맞대고 앉거나 손을 잡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저절로 말하게 되는 것, 여기에 벗과의 진정한 사귐이 있습니다.]


좋은 벗이란 어떤 벗인가? 좋은 벗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먼저 좋은 벗이 되어야 한다.

[p122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벗들과 함께 있으면 가슴속에 간직한 포부가 두루마리 종이처럼 저절로 풀려나왔다. 가슴속에 담긴 울분을 토해 놓고 위로받는 것도 벗들에게서였다. 앞으로 다가올 우리들의 시간이 조금은 나아지리라 서로 믿고 기대며 견딜 수 있는 것도 벗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 길 떠나는 백동수에게 박제가가 던진 물음이 귓가에 맴돈다

“우리도 그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말하게 되는 벗이었습니까?’


풍요로움이 우리를 더 여유롭게 하였는가? 그때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풍족해졌음에도 더 각박해지고 마음은 더 궁핍해져 하루하루를 물질과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보라. 그러므로 있으면 나누겠다는 것은 허황된 마음이다. 없을수록 나누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격동의 시대, 신분으로 막힌 자신들의 암담한 미래 속에서도 풍류를 잃지 않고, 벗들과 나누며 품위 있게 놀던 백탑파들의 품이 그리운 시절이다. 


[p48벗들이 지어준 나의 공부방

‘보다 못한 벗들이 가진 것은 조금씩 내어 서재를 지어 주자는 의논을 한 듯싶다. 얼마 전, 백탑 아래 사는 또 다른 벗 서상수의 집에서 꽤 많은 책들이 서적상으로 실려 나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보니 그가 아끼던 책들이 마당에 부려 놓은 나무가 되어 내 집으로 찾아온 모양이다. 다른 벗들도 모두 넉넉한 형편이 아니니, 저 속에는 그들의 책도 제법 있을 것이다.’]

[p34 맹자에게 밥을 얻고 좌씨에게 술을 얻다

 ‘유득공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선뜻 자신이 아끼는 책까지 팔아 나와 아픔을 같이하고, 또 나의 부끄러움을 덜어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역시 무척이나 책을 아끼는 사람이었으나,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먼저였을 것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문제다. 지천명이라는 나이를 넘은 지 오래 건 만 하늘의 명을 알기는커녕 세상의 시끄러움에 혹하며 살고 있는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250여 년 전 연암 선생이 세상에 전하는 아래 말씀이 죽비소리다. 


[P176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느끼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사물을 받아들인다.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싶은 것, 인정하고 싶은 것을 미리 정해 두고, 그 밖의 것은 물리치고 거부한다. 그러한 마음에 기초가 되는 것은 역시 지난날에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은 자신만의 감각이나 경험이다. 이것이 바로 선입견(先入見)이다. (중략) 사람을 사귈 때도 신분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을 먼저 보게 되니, 참다운 벗을 만나 마음을 나누기도 어렵다. 선입견은 결국,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과 사물의 본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는 편견이기도 하다.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힌 세상은 새로운 활기라고는 없는 세상, 변화를 거부하는 낡은 것들로 만 가득한 세상일 것이다.

“자네들은 눈과 귀를 그대로 믿지 말게, 눈에 얼핏 보이고 귀에 언뜻 들린다고 해서, 모두 사물의 본모습은 아니라네’]


책을 덮고 나니 예전 고전시간에 배웠던 주자의 권학문(勸學文)이란 한시가 떠오른다. 이덕무와 백탑파 동무들을 기리며 더 늙기 전에 동무들과 놀 수 있는 청장서옥 같은 사랑방 짓는 꿈을 다시 가져 본다.

 

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이노학난성 하고: 소년은 쉬이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一寸光陰不可輕 일촌광음불가경이라: 한순간 짧은 시간도 가벼이 여지기지 마라

未覺池塘春草夢 미각지당춘초몽 하여: 연못의 봄풀은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는데

階前梧葉已秋聲 계전오엽이 추성이라: 섬돌 앞 오동나무 잎은 가을 소리를 알린다.

(권학문 勸學文/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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