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이다.
더 나은 일주일을 살아낼 다짐을 하며 플래너를 펼친다.
탁자 위엔 쓰다가 포기한 몇 권의 플래너가 쌓여있다.
모두 인스타 알고리즘이 나에게 알려 준 것들인데,
그 플래너만 있으면 시간부자로 살 게 될 것 같아서 사들인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방법으로 공들여 플래너를 쓰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어떤 플래너를 써도 채워 넣기만 하고 비워내지는 못하는 목표와 계획들은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속절없이 밀려날 뿐이다.
AI강의 듣기, 독서, 글쓰기, 러닝, 장보기..
TO DO 리스트를 다 쓰고 나면 조금 뿌듯해진다.
이 정도면 오늘 하루를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오늘도 야무지게 시작한 나 자신을 치하하는 의미로
잠시 동안의 핸드폰 순시를 허락한다.
잠깐 숨을 고르려던 마음은 어느새 엄지손가락을 타고
알고리즘의 파도 속으로 휩쓸려 내려간다.
누군가의 근사한 점심 식탁, 누군가의 새로 산 가방, 누군의 탄탄한 복근.
보면서 딱히 즐겁지도, 그렇다고 정보가 되는 것도 아닌데
손가락은 자석에 끌리듯 계속 위로 올라간다.
시퍼런 액정 불빛에 눈이 시큼해져서 정신을 차려보니
아뿔싸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코앞이다.
허둥지둥 아침에 써 놓은 리스트를 확인한다.
아무것도 지우지 못한 나의 TO DO 리스트.
더 비싼 플래너를 사고,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는 기법을 배우고,
할 일마다 알록달록한 색깔을 입혀보기도 했다.
그런데도 일상의 분주함과 속절없는 시간 낭비는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어느 월요일 아침, 마침내 나는 늘 쓰던 리스트의 방향을 반대로 틀어보았다.
'오늘 할 일' 대신, '오늘 하지 않을 일'을 적었다.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피드 따라가지 않기.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비교에 에너지 쓰지 않기.
부탁하지도 않은 곳에 과한 친절 퍼붓지 않기.
써놓고 보니 이 일들의 공통점이 보였다.
이런 일들은 모두 밖에서 나에게 달려드는 것들이다.
알고리즘은 내 시선을 붙잡으려 설계되어 있었고,
비교는 타인의 삶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이었고,
과한 친절은 타인의 기대에 내가 끌려가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NOT TO DO 리스트를 쓴 날 저녁에도
플래너엔 아직 지우지 못한 항목들이 남아 있었다.
AI 강의를 못 들었고, 러닝도 못 했다.
여전히 완벽하지 못한 하루였다.
그렇지만 평소처럼 뼈저린 후회가 밀려오진 않았다.
적어도 내가 정한 '하지 않을 일'만큼은 지켰으니까.
알고리즘에 두 시간을 헌납하지 않았고,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비교에 끌려가지 않았다.
부탁하지도 않은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다.
나는 하루 종일 나의 편이었다.
그날 일기에는 이렇게 쓸 수 있었다.
'오늘 나는 나를 꽤 잘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