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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학자의 책장 Oct 13. 2019

It’s really something.

대성당 - 레이먼드 카버

In the movies, the blind moved slowly and never laughed.
영화에서 맹인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웃는 법이 없다.

이번에 소개드릴 책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대표작 ‘대성당’입니다.


대성당의 주요 등장인물은 나, 나의 아내, 아내의 친구 로버트입니다.


대성당은 아내의 오랜 친구 로버트가 화자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로버트는 맹인으로 화자의 아내는 10년 전 맹인에게 글을 읽어주는 일을 하며 로버트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이내 친한 친구가 되었으나 이사를 하게 되면서 멀리 떨어져 지내게 됩니다. 아내가 떠나기 전 로버트는 아내의 얼굴을 한 번 만져 볼 수 있냐고 물었고, 로버트가 손가락으로 아내의 얼굴을 찬찬히 만진 경험은 아내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그들은 10년의 시간 동안 떨어져 있었지만 녹음테이프를 주고받으며 연락을 지속합니다. 그 사이에 아내는 자살을 시도하고, 전 남편과 헤어지고, 나를 만나 재혼을 합니다. 로버트는 아내의 후임으로 온 여자 뷰라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뷰라는 암으로 죽습니다. 로버트는 뷰라의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코네티컷으로 오는데 마침 화자와 아내도 코네티컷에 살고 있어 이들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합니다.


그동안 주고받은 녹음테이프 덕에 서로의 사생활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아내의 오랜 친구의 방문, 화자는 이런 상황에도 무덤덤하게 행동합니다. 그저 맹인이 자신의 집에 온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죠.


A blind man in my house was not something I looked forward to.

내 집 안에 맹인이 있다는 것은 내가 기대하던 일은 아니었다.


화자는 주변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 짧은 문장, 맹인과 흑인에 대한 편견, 아내가 쓴 시에 대한 무관심 등 글의 문체를 통해 조금씩 전달됩니다.


I admit it’s not the first thing I reach for when I pick up something to read.

내가 무언가를 읽고자 할 때, 들어 올리는 책이 시집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내 이야기로는 로버트는 지난 10년간 아내의 말을 아주 잘 들어준 듯 보입니다. 그러나 아내와 화자의 이야기를 보면 화자는 그다지 잘 듣지 않습니다.


이런 화자의 무심한 태도는 듣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로버트가 등장하면서 더 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화자는 기차를 타고 온 로버트에게 기차를 타며 풍경을 보기 좋은 방향을 알려주고자 이런 질문을 합니다.


“which side of the train did you sit on by the way?”

기차 어느 쪽에 앉아서 오셨나요?


대관절 맹인에게 기차의 어느 쪽에 앉는지가 중요할까요?


그러나 로버트는 기분 나쁘게 듣지 않고 “right side(오른쪽 혹은 바른 쪽)”라고 대답합니다.


아내와 로버트가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화자는 이야기에 잘 끼이지 못하고 로버트를 관찰합니다. 로버트는 앞이 보이지 않는데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옷도 깔끔하게 입었고, 지팡이를 쓰지도 않고, 컬러 TV와 흑백 TV를 구분할 수 있고, 포크와 나이프도 능숙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탁한 눈동자를 보면 그는 분명 맹인이 맞아 보입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고 취하도록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웁니다.


아내는 잠들고 로버트와 화자는 TV를 봅니다. 늦은 밤 TV에는 대성당이 나오고, 화자는 앞을 못 보는 로버트를 위해 대성당의 생김새를 알려주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피상적인 묘사에 그칩니다. 조금 더 절박한 마음으로 대성당을 묘사하는 일에 목숨이 달려 있다고 상상을 해 보지만 결과는 시원찮습니다.


로버트는 괜찮다며 팬과 종이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하고는 같이 대성당을 그리자고 제안합니다. 로버트는 팬을 잡은 화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립니다.


Go ahead, bub, draw, He said. Draw. You’ll see.  

시작하게, 그가 말했다. 그려. 내가 뭘 하고자 하는지 자네도 곧 알게 될 거야 (너도 볼 수 있을 거야)


화자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 그림을 그리고 나자 로버트는 화자에게 눈을 감으라고 그리고 멈추지 말고 계속 그림을 그리라 합니다. 화자는 눈을 감고 다시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의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고 로버트의 손은 화자의 손 위를 타고 따라 움직입니다.


이윽고 그림이 완성되고 로버트는 말합니다.


Then he said, “I think that’s it. I think you got it,” he said. “Take a look. What do you think?”

거의 다 왔어. 자네가 성공한 거 같아, 어디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그러나 화자는 계속 눈을 감고 있습니다.


But I had my eyes closed. I thought I’d keep them that way for a little longer. I thought it was something I ought to do.

그러나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 더 눈을 감고 있어야 할거 같았다. 그것(눈을 감는 게) 바로 내가 해야 할 일 같았다.


로버트는 화자에게 재차 그림을 보고 있냐고 물어봅니다.


“Well?” he said. “Are you looking?”

어때? 보고 있나?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봅니다.


My eyes were still closed. I was in my house. I knew that. But I didn’t feel like I was inside anything.

내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나는 내 집에 있었다. 분명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마치 어디 안에도 들어가 있지 않은 기분이었다.

“It’s really something,” I said.

"이거 정말 대단하군요.(눈을 감았지만 볼 수 있다는 것)"나는 말했다.


이야기 내내 로버트는 마치 눈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행동합니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보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손가락으로 얼굴을 만지는 것, 카세트테이프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 이야기, 시를 듣는 것, 이것은 모두 보는 게 아니지만 보는 것 이상을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반면에 눈과 귀가 멀쩡한 화자는 해 주는 이야기도 듣지를 못하고 눈으로 보는 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수 없이 봐온, 지금 TV를 통해 눈 앞에 보이는 대성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대성당을 묘사하는 일에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다고 스스로 암시를 해봐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습니다. 본다는 것은 너무 쉽지만 잘 보는 것은 눈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대성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묘사해 봅시다. 크고 높은 건물이 있다. 그 벽에는 온갖 조각이 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요? 이런 묘사는 화자가 로버트를 만나기 전 맹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과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의 묘사입니다.


My idea of blindness came from the movies. In the movies, the blind moved slowly and never laughed.

영화에서 맹인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웃는 법이 없다.


그러나 로버트는 쾌활하고 잘 웃는 인물이었죠. 편견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대성당은 너무 복잡해서 어떤 특정한 묘사를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성당만 복잡한 것일까요? 한 편의 시, 우리가 살아가는 곳,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과연 대성당보다 단순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성당은 눈이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이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도 눈이 있지만 그리 잘 봐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화자가 말했던 'A blind man in my house'는 그러니까 '집안에 있는 앞을 보지 못하는 이'는 맹인인 로버트가 아닌 화자(혹은 '나')인 게 아닐까?

그래서 진짜 보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화자(혹은 '나')는 어디에도 갇히지 않은 시각을, 관점을 조금은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왓슨, 자네는 눈으로 보긴 해도 관찰을 하지 않아. 보는 것과 관찰하는 것은 전혀 다르지. 예를 들어 자네는 홀에서 이 방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허구한 날 봤어.”
 
“그랬지.”
 
“몇 번이나?”
 
“음. 수백 번.”
 
“그렇다면 계단이 몇 개지?”
 
“몇 개? 그거야 모르지.”
 
“바로 그거야! 자네는 관찰을 하지 않았어. 하지만 눈으로 보긴 했지. 내 말의 요지는 바로 그거야. 난 계단이 17개라는 걸 알고 있어. 나는 눈으로 보면서 동시에 관찰을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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