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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학자의 책장 Oct 09. 2019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달과 6펜스 - 서머싯 몸

소설을 크게 나눠 보자면 질문을 던지는 소설과 답이 정해진 소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도를 기다리며’, 이방인 등 은 이야기를 통해 질문을 던지는 소설입니다. 이런 소설은 이야기 안에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을 찾아야 하고 또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소설 안에 드러나 있지 않아서 진입장벽이 높은 편입니다. 그러나 좋은 질문은 시대와 무관하기 쉬워 소설의 수명이 긴 편이고 그래서 많은 고전들이 이 범주에 속합니다.


답이 정해진 소설의 경우 비교적 읽기가 쉬워 널리 읽히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답이 변하기 마련이라 소설의 수명이 짧은 편이고 그래서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는 종종 찾을 수 있지만 스테디셀러 중에서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 둘 사이에 애매한 영역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이야기를 통해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그 이야기가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인 소설입니다. 이때 저자가 제시한 답이 별로라면 자칫 유치해질 수 있는 방법이지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입니다.


달과 6펜스는 바로 이런 방식의 소설 중 한 권인데요, 책을 통해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삶의 의미는 행복에 있는가?’이고 동시에 찰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는 행복하지 않지만 의미 있어 보이는 삶의 한 예시입니다.


이런 타입의 소설을 한 권 더 떠올려보면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오르네요. 그러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는 관찰자와 주인공 둘 다 너무나 독창적인 캐릭터여서 현실성을 조금 상실한 반면 달과 6펜스는 적당한 관찰자를 배치함으로써 완전히 비현실적인 캐릭터인 찰스 스트릭랜드를 마치 실존인물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주인공이 아닌 화자인 ‘나’를 소개하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설의 전반부를 읽으며 ‘나’는 반골기질이 있지만 사회적 합의를 잘 따르는 인물이며, 사교활동의 비합리성을 인지하면서도 그 사회에서 머무르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는 작가로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고 너무 튀는 것을 꺼려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기꺼이 도와주려고 합니다. “상당히” 일반적인 인물이죠. 상상하기 너무나도 편안한 인물을 화자로 선택하면서 화자의 이름을 지우고 ‘나’라고 지칭함으로써 독자는 이 화자를 실재 작가라고, 혹은 심지어 독자 자신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를 통해 작가가 직접 스트릭랜드를 관찰한 것처럼 여기게 하여 전혀 있을 법하지 않는 찰스 스트릭랜드가 실존인물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를 통해 소설 속 캐릭터들이 가지기 힘든 비 일관성, 즉 ‘아무런 이유 없는 행동의 변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마블에서 캡틴 아메리카가 히드라 소속을 옮겼다!라는 영화를 만든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캡틴의 행동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은 변화이기 때문에 공감을 얻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인물은 언제 히드라로 옮겨도 이상하지 않죠. (와 그 사 람 보기랑 다르네? 정도의 감흥만 있을 것입니다.) 서머싯 몸은 ‘나’를 현실의 인물처럼 여기게 함으로써 찰스 스틀릭랜드 역시 실존인물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그의 이유 없는 변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합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화자를 자신처럼 묘사했다는 것은 이 책의 주석들을 보면 더 명확해집니다. 스트릭랜드의 그림과 생애에 관한 저서들이 진짜 있는 것처럼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달과 6펜스에서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의 행동에 이유를 잘 알려줍니다. 앞서 이야기 한 ‘나’에 대해 충분히 설명이 되어있었기에 ‘나’가 스트릭랜드의 기행에도 불구하고 그를 떠나지 않는지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스트릭랜드 부인에 대해서도 작가들을 불러서 오찬회를 여는 것을 좋아하고, 집을 유행대로 꾸미고,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비웃었음에도 그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면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거짓말을 스스로에게 서슴없이 하는 모습 등을 통해 스트릭랜드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블란치 스트로브가 왜 남편을 떠나 스트릭랜드와 함께 살기로 맘을 먹었는지, 왜 더크 스트로브에게 돌아가지 않고 자살을 택했는지에 대해서도 그들의 과거를 알려주며 충분히 납득시킵니다. 심지어 더크가 스트릭랜드가 그린 블란치의 누드화를 왜 찢어버릴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독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까지 스트릭랜드가 그림을 왜 그리는지 알지 못합니다. 스트릭랜드는 그림을 그리지 말아야 하는 수많은 이유를 알지만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참 무모해 보입니다. 그러나 비인간적이고, 인간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을 수 없고, 바보같아 보이던 스트릭랜드가 결국 자신이 추구하던 곳에 도달하고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독자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의 비참한 삶이 죽음을 앞두고 구원받은 듯 보입니다. 


스트릭랜드의 삶은 이런 질문은 던집니다.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서머싯 몸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지만 의미 있어 보이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러분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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