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쉼표20 : 아둥바둥 말고 최선을 다하는 멋진 아이
아이를 낳고서야 아빠가 종종 하시던 말이 온전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너희 엄마는 너희 낳느라 빈껍데기만 남았다.”
그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알게 되었고,
"키워봐라. 자식 키우는 게 어디 니 맘대로 되나"며 불평하던 아빠의 마음도,
그시절 워킹맘으로서 매일 밤 우리 모르게 흘렸을 엄마의 눈물도 이제는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깨달은 것이 있다. 어른인 우리는 모두 마음 한 켠에 아이인 나 자신의 공간이 남아있다는 것을.
그래서 아이를 키우다보면 때론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때 느꼈던 감정이나 아쉬운 순간들을 다시 찾아내기도 한다.
얼마 전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집에서 며칠을 보내고 올라왔을 때의 일이다.
모처럼 부모님께서 아이들을 봐주셔서 나와 신랑은 둘만의 외식을 즐기고 느즈막히 돌아왔다. 집으로 들어가려는 길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아빠를 만났고, 나는 신랑을 먼저 들여보내고 오랜만에 아빠와 밤 산책 시간을 가졌다.
아빠는 직장에서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업무가 바뀌면서 힘들어하는 동생 얘기로 한참 걱정을 늘어놓으셨다. 그 이후는 내 차례였다. 양가 부모님 도움 없이 복직 후 일과 육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내 삶을 안타까워하셨다.
"안정적이고 여성들에게 좋다는 직장을 다니고 있는 네가 왜 그렇게까지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말을 하며 한숨을 쉬는 아빠의 모습에서, 학창시절 나를 대하던 아빠의 모습이 보였고, 미래의 아이들을 대할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빠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기에 늘 우리에게 바라는 삶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 삶을 향해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때로는 격려하셨고, 때로는 안쓰러워하거나 걱정하셨다. 나는 아빠의 자랑이 되고 싶었지만, 주로 아빠의 걱정거리로만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빠의 긴 걱정들을 들어주다가 문득 나는 아빠에게 이런 말을 건냈다.
"'너희는 둘 다 왜 그렇게 아둥바둥 힘들게 사는지 모르겠다'라는 말 대신에, '아빠는 매순간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아가는 너희가 참 멋지다고 생각해'라는 말은 어때요? 그럼 아빠도 걱정이 줄어서 좋고, 우리는 아빠의 인정을 받아서 좋고. 다 좋을 것 같은데요."
한평생 아빠로서 자녀들의 앞날을 걱정해온 집안의 가장이 그런 말을 듣는다고 바로 "오 그래, 정말 좋은 생각이구나" 할 리는 없었다. 그 대화는 그 시점에서 흐지부지 동력을 잃었고 우리의 산책도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긴 밤산책을 끝내고 잠자리에 누운 뒤에도 그때의 대화는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아이가 태어난 이래로 아이들에게 걱정하는 부모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 것 같기 때문이다. 배밀이를 해야 하는 시기에는 왜 이렇게 늦게 기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하고, 복직을 앞둔 시기에는 애착형성이 잘못된 것 같다고 걱정했다. 지금은 또 잘 먹다 못해 또래에 비해 너무 많이 먹어서 걱정이라는, 누군가는 부러워할 걱정거리를 달고 살아간다.
그럼 그 모든 오늘치 걱정거리가 해소된다면 우리의 삶은 무걱정의 삶으로 접어들 수 있을까? 놀랍게도 때로는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오늘로 끌고 와서 '내년에 유치원에 가서 우리 아이들이 적응을 못하면 어떻게 하지?' 같은 류의 생각으로 이어지곤 한다. 걱정은 이렇게 관성이 되어 세대를 이어간다.
아빠에게 던진 그 말을 곱씹어보니, 그것은 자녀로서 부모에게 건넨 메시지임과 동시에 이제 엄마가 된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나는 아이에게 걱정 대신 격려를, 구체적인 목표 설정 이전에 묵묵한 박수를 보낼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 먼저 나 자신에게 말해주려 한다.
“괜찮아,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렇게 나의 오늘을 다독이다 보면, 아이를 보는 내 시선에도 걱정대신 여유가 깃들고 언젠가 아이도 스스로에게 같은 말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괜찮아. 오늘을 이렇게 살아낸 난 참 괜찮은 사람이야” 이런 말을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 괜찮은 엄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25.09.15
부모님을 진심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
우리 앞에는 진짜 부모가 되기 위해 지나야할 길을 보이기 시작하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치의 걱정부터 내려놓는 연습을 해보아야겠습니다.
오늘도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같이 연습해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