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은인'이라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반대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나 생각하는 나에게 그녀는 '인연'이다.
제주 한달살이 중인데 수많은 오름 중에 한 곳 정도는 올라가 봐야 되지 않을까? 가까운 거리의'오름의 여왕'은 가봐야겠다고 다짐한다. 김밥을 사서 가방에 넣고 택시를 잡기 위해 큰길로 나가는데, 자꾸자꾸 마음이 흔들린다. '그냥 카페에 가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반복되는 유혹을 뿌리치고, 오늘은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이기로 단단히 마음먹는다.
택시 기사님의 오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들으며 이동하니 금방이다. 평지 걷기는 어딘들 자신 있지만 오르막길이 있는 산행은 힘들거란 확신을 하며 계단을 오른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숨이 차고 정확히 힘들다. '카페를 가는 것이 맞았나?' 하며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할 때쯤 계단 없이 편안하게 오르는 길이 시작된다. 계단보다는 조금 수월하다. 하나씩 떨어지는 벚꽃을 잡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소원은 다음에 빌고, 눈앞에 떨어지는 벚꽃 잎을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잠시 숨을 고르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와'탄성이 절로 나온다. 탁 트인 시야에 제주의 초록들판과 귀엽게 솟아있는 수많은 오름, 저 멀리 성산일출봉까지 보인다. 금세 '오길 잘했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어느 정도 올라가니 앉아서 풍경을 볼 수 있는 계단식 데크의자가 있다. 이동하면서 주변을 보는 것과 앉아서 병풍처럼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다르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제주다.
요동치는 심장이 '이 주인이 왜 이러노?'항의하는 듯하다. 시원한 바람에 땀은 자취를 감추고, 맑게 지저귀는 새소리에 차분해진 마음은 심장소리도 안정을 찾게 한다.'정상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여기서 점심을 먹어야겠다.'생각하고 다시 힘을 내서 정상까지 올라가니 오르막길로 시작하는 오른쪽으로 가는 길과 평지로 시작하는 왼쪽으로 가는 길이 있다. 한 바퀴 돌아서 내려오는 길은 같으니 다른 사람들과 다른 왼쪽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평지를 걸으며 숨을 고르니 '왼쪽 길을 잘 선택했다.' 싶다. 천천히 걷다 보니 계속 사람들과 마주친다. 같은 방향으로 돌면 불편함 없이 길을 갈 수 있었을 텐데, 반대로 도니 정상을 돌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마주친다. 비켜주고 비켜가며 서로에게 민폐다. 공원에서 운동하는대부분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방향으로 도는 것을 보면서 뭔가에 홀린듯한 모습에 이상해했었는데'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대는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구나!' 싶다.
그렇게 중간중간 불편한 대면을 마주하며 정상을 돌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정말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또 '아, 다들 오른쪽으로 도는 이유가 있었구나!' 한다. 다시 앞을 보며 걷다 보니 '오른쪽으로 걷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보는 풍경은 제대로 못 볼 테니 어느 쪽으로 걷든 못 보는 풍경은 있겠구나!' 스스로를 위로하게 된다. 그렇다고 양방향 모든 풍경을 담기 위해 출발점에서 다시 U턴할 의향은 없다.
바람에 맞서 열심히 걷는데, 다홍빛 상의를 입은 환한 표정의 여성이 내가 온 길을 보며, 이 길로 가면 내려가는 길이 있는지 묻는다. 반대방향으로 돌고 있는 나는 '네, 제가 반대방향으로 돌고 있는데, 이쪽으로 쭉 가시면 됩니다.'라고 대답해 준다. 그렇게 다시 걷기 시작해 정상을 다 돌아갈 때쯤 아까 본 여성이 다시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다. 순간 '두 바퀴 도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왜 다시 도세요?'라고 물으니, 입구를 지나쳤단다. 낯선 곳에서의 반복되는 만남은 순식간에 친근함이 되어 함께 출발지점을 향해 걷게 한다.
대화를 하다 보니 육지에서 살고 있는 곳도 인근이다. 서로의 이름 외에는 다른 것은 묻지 않고 대화를 이어간다. 한달살이를 하고 있는 나와 오늘 와서 내일 돌아가는 짧은 일정의 그녀는 그렇게 잠시 일행이 된다. 김밥 먹기로 했던 곳에 같이 앉아 풍경을 보며 머문다. 사교적인 그녀는 대화를 참 편안하게 하는 따뜻함을 가진 사람이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 속에 커피 얘기가 나오면서 함께 카페로 향한다.
이웃 동네에서 하루 머물 계획이었던 그녀는 내가 머무는 곳에서 숙소를 잡고 머물기로한다. 정말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나온 그녀의 자유로운 모습은 일단 숙소부터 잡고 시작하는 나에게는 새로움이다. 엄청난 극찬으로 평소 커피를 즐기지 않는 그녀를 카페로 대려왔는데, 선택한 커피의 산미가 좀 강한 듯하다. 커피에 낯선 사람에게는 부담스러울 수 있는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비워내는 그녀의 모습은 나를 배려한 속 깊은 진심이리라.
카페를 나와 이곳저곳 좋았던 곳을 추천해 주면서 해변까지 다다르니 '이제 숙소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다.'는 그녀와 헤어질 타이밍이다. 귀염 가득한 그녀와 언젠가 또 다른 인연으로 만나길 바라면서 어떤 기약도 하지 않고 헤어져 서로의 길을 간다.서른 이후로 정보 없는 낯선 사람과 꾸밈없는 얘기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공유했었적이 있었던가!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참 무섭다'는 생각에신분이 불분명한 사람과는 거리부터 두게되고 안전하다 싶은 사람들과만 관계를 형성해 왔던 것 같다. 그녀의 등장은 사람과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단초가 되어준다. 고마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