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흔적을 자연의 일부로 표식 없이 묻어달라시던 유언을 남겨진 자가 살고 싶어 묻었다.
남겨진 자를 위한 유골함에 아무런 흔적이 없다. 그녀를 닮은 단아한 유골함만 존재할 뿐 어떤 글귀도 사진도 위폐도 없다.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녀의 뜻에 따라 남기지 않은 것이라 스스로를 믿게 한다. 가족들만 아는 그녀의 자리는 뭔가 비현실적이다. 정말 이 속에 그녀가 있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생길 때면 모순적이게도 그 의문이 가장 큰 위안이 되어준다.
한 달에 1~2번씩 혼자 최대한 한적한 시간에 맞춰 그녀를 보러 간다. 어떨 때는 담담하게 그녀와 마주한 후 누군가의 묘지 위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 잡고 앉아 한참을 멍하니 커피 한 잔 마시고 내려온다. 또 어떨 땐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그대로 흘려보내고 같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한 참을 그녀와의 마지막 순간에 머물러 커피 한 잔을 하염없이 비워내고 내려온다. 그렇게 현실과 마주하지 않은 채 외면하고 도망치며 숨을 쉰다. 가끔 가족과 함께 그녀를 보러 올 때면 혼자 남아 절을 하는 그녀의 아들을 보며, 생전처럼 손 흔들며 인사하고 돌아 나오는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한다.
명절을 앞두고 늘 그렇듯 혼자 그녀를 만나러 왔다. 유골함을 보며 처음으로 허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그러면서도 "엄마, 안녕" 손을 흔들고 나온다. 집으로 돌아와 몇 년 만에 사진첩을 꺼내 들었다. 몇 년만이 아니라 6~7년쯤 된 것 같다. 그녀의 시간이 한정되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부터 과거 사진을 보지 않았다. 이사를 왔을 때도 싸놓은 앨범꾸러미를 그대로 책꽂이 위에 올려뒀다. 과거가 무슨 의미냐며 현재를 살자고 다짐하면서 사진을 보지 않게 됐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사진과 현재를 사는 게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한편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꾸역꾸역 받아들이기 위한 합리화가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변해가는 엄마의 모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했던 실오라기 같은 가여운 의지였을지도.
외면했던 그동안의 내 마음을 이제야 들여다봐진다. 겁이 나고 무서웠다. 그래서 모든 것을 과거라 취급하며 깊숙이 숨기고 외면했다. 그래야 아무렇지 않게 웃어지고 숨이 쉬어지니까 말이다. 무슨 용기가 나서인지 앨범을 펼친다. 투박한 옛 앨범에서 모든 사진을 하나씩 떼어낸다. 그냥 거추장스러운 앨범이 거슬려 빈 박스에 사진을 한 장 한 장 쌓아서 담는다. 그러다 익숙한 듯 낯설게 마주한 사진 한 장. 내 모습만 보였던 사진 속에 춤추는 딸의 뒤에서 너무나 밝은 모습으로 웃음 짓고 있는 지금의 나보다 젊은 그녀가 있다. 이런 아름다움조차 묻어두고 감히 꺼낼 용기조차 없이 두려움에 몸을 숨긴 가여운 나도 보인다. 이런 약한 딸 때문에 예쁜 추억을 들춰보며 힘든 시기를 좀 더 따뜻하게 보낼 수도 있었을 순간을 놓친 그녀가 겹친다.
한 사람의 삶은 현재의 모습이 다가 아닌 것을. 걸어온 모든 흔적과 순간을 무심한 듯 소중히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을 때, 과거가 현재를 살아가는 거름으로 온기를 줄 수 있을 때 진정 현재를 산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나의 현재는 온전한 진짜가 아니다.
명절이 되어 가족이 모인 자리, 엄마 위폐를 세우면 어떻겠냐는 갑작스러운 아빠의 제안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움으로 흐른다. 그녀를 납골당에 안치하기로 결정하면서 '언젠가는 엄마의 뜻대로 해드릴 테니 조금만 더 욕심낼게요. 죄송해요.' 하던 우리는 그녀를 놓을 생각이 없음에 무언의 동의를 하는 듯하다. 위폐 신청서에 비워진 공간을 채우다 멈칫한다. '고인에게 남기는 말' 분명 오빠 성격에 밤새 생각했음이 틀림없고 나 또한 어떤 말을 남길지 준비를 했으나 선뜻 글을 쓰지 못한다. 그녀의 아들은 꼭 해드리고 싶었던 말을, 그녀의 딸은 자신을 지탱해 준 말을 남긴다.
죽은 자의 특권이 산 자의 아픔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는 대사(드라마 '꼭두의 계절'에서 꼭두의 대사였던 듯)를 떠올리며 합리화하고, 남겨진 자의 이기심도 뒤늦게 정당화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