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억 여행을 한다. / 에세이
여행은 목적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동행했는지도 중요하다. 젊었을 때에는 친구들과 연인이 생겼을 때에는 둘만의 로맨틱한 여행을 한다. 가정을 이루면 가족과 추억 만들기 여행이 시작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사진으로 그때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표정은 행복한 가정의 일부분이 된다.
이번 여행은 가족과 함께 부다페스트에서 시작했다. 어린아이들 때문에 짐이 많아서 렌터카를 이용했다. 오랜 시간을 운전할 수 없어 많은 곳을 볼 수는 없지만, 중간에 쉬어가는 여유로움이 오히려 여행의 편안함을 느꼈다. 아이들은 다행히도 운전 중에는 잠을 자서 주변의 풍경을 보면서 갈 수가 있었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호수였다. 알프스 산맥을 끼고 있는 유럽 국가들은 수많은 청정 호수를 보유하고 있다. 산과 어우러진 호수를 바라보면 그냥 머무르고 싶은 그런 곳들이다. 부다페스트에서 시작한 이유도 내륙국인 헝가리의 유일한 바다와 같은 호수인 ‘발라톤’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일반적으로 여행 전 일정에 맞춰 현지 호텔이나 B&B 사전 예약으로 숙소를 정하는데, 이번 여행은 숙소 예약 없이 자유롭게 호수를 중심으로 이동하였다. 발라톤의 끝없는 수평선을 뒤로하고, 오스트리아 국경을 무사통과하여, 석양이 떨어지고 있는 비엔나에 도착했다.
첫날은 지인의 소개로 여름 방학 동안 비어 있는 빈 대학교의 기숙사에서 보냈다. 넓은 대학 캠퍼스는 거대한 호수처럼 느껴졌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호수에 빠졌을 것이다. 비엔나의 여름 숲은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뜨거운 한낮에도 빛이 그리워지는 그늘은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숲이다.
비엔나를 떠나기 전에 쇤브룬 여름 궁전을 방문했다. 정원의 화려한 꽃들, 하늘을 향해 쭉 뻗은 나무들, 조각상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의 물줄기, 마리 앙투아네트가 뛰어놀던, 여름에 가장 아름다운 궁전임에 틀림없다. 궁 내부의 많은 방들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
늦게 도착한 그문덴은 멀리 보이는 오르트성이 호숫가에 반사된 석양빛으로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여행 시즌이라 B&B에는 이미 방이 없었다. 시청 광장 뒷골목으로 들어가니, 이태리 음식점이 보였다. 해외를 여행하면 한국 음식이 먹고 싶지만, 이태리 음식은 마늘을 많이 사용해서인지 그리움을 잊게 해 준다.
메뉴판을 가져다주는 주인에게 민박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식사를 하면서도 주인의 표정을 계속해서 힐끗 쳐다보았다. 아이들만 아니라면 신경이 덜 쓰였을 것이다. 계산서를 달라고 주인을 부르자, 그는 밝은 모습을 하며,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그가 소개해 준 집은 호수가 보이는 멋있는 곳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창 너머에 산으로 둘러싸인 트라운제호수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여행의 피로감이 잔잔한 호수처럼 사라졌다. 아이들은 이미 밖에서 오리들과 친구가 되었다. 집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식당 테이블에는 싱싱한 채소, 과일, 오븐에 갖구워낸 빵과 요구르트 그리고 샛노란 오렌지 주스가 놓여 있었다.
호수 주변을 산책하면서 과거의 분주했던 여행과는 달리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많은 것을 보고, 정신없이 즐겨야 한다는 다급함이 없었다. 파란 호수 속으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빠지기도 하고, 수면에 반사되는 하늘의 하얀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시선을 잃어버렸다.
도자기 가게에서 본 그문드너(Gmundner)는 모양과 문양이 단순하고, 색상이 화려하지도 않았다. 가게 주인의 설명대로 단단하고, 실용적이라 정직하고 규칙을 준수하는 오스트리아 사람들과 많이 닮았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그문드너처럼 그렇게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이들이 자라서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보며 그리워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쯤이면 호수 옆 작은 집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노년을 보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서 호수로 흘러내리듯이 세월도 마음속으로 녹아내려 스며들었으면 한다. 이번 여행은 호수라는 단어만 떠올랐다.